무엇보다 미국 필라델피아에는 손꼽히는 개혁주의 신학교들이 많다. 그 중 웨스트민스터신학교는 한국교회의 유능한 지도자들을 많이 배출했다. 그런 이유에서 당시 많은 한국 유학생들이 공부하고 있었고 난 그들 대부분은 언젠가는 한국교회를 섬기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한국인 교수가 당시엔 없었다. 교인들에게도 “안정적으로 교회를 섬기면서 신학생들이 잘 공부하도록 돕는 것도 제 목회 중 하나일 것”이라고 설득했다. 실은 그때 누가 내게 강의를 해달라고 부탁한 일은 없었다. 그저 그런 사역을 했으면 하는 막연한 생각뿐이었다. 떠나야 할 이유를 설명하려는 시도였을 뿐이었다. 결국 교인들에게는 10년 후 꼭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필라델피아연합교회로 떠났다. 그 후 교회가 분열됐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얼마나 무거웠는지 잊을 수 없다. 내가 떠난 후 교인 40여명이 임마누엘교회를 떠나 브니엘교회를 창립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시간이 흘러 92년 어느 날 임마누엘교회에서 연락을 받았다. 10년이 지났으니 약속대로 돌아오라는 연락이었다. 하지만 나는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었다. 지금은 하나님 곁으로 떠난 아내가 그때는 뇌졸중으로 자리에 누운 지 1년쯤 됐을 때였기 때문이었다. 벌여 놓은 일도 있고 해서 어쩌나 싶던 차에 손원배 목사님께서 목회할 의향이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무릎을 ‘탁’ 하고 쳤다.
이건 꿩 대신 닭이 아니라 닭 대신 꿩을 보내는 일이 아니던가. 역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싶었다. 우리가 우리 뜻대로 하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이 이미 여건을 만들어 역사를 이끌고 계셨던 것이다. 결국, 다행히 10년이 지난 그해 4월 5일 뿌리가 같은 두 교회는 연합했다. 이를 이룬 손 목사님의 기도와 지도력이 힘이 컸다고 믿는다. 참, 그때는 손 목사님의 머리숱이 많았다. 훗날 만난 임마누엘교회 교인들에게 “손 목사님의 그 많던 머리카락이 그동안 다 어디로 갔는지 우리 임마누엘교회 교인분들은 아마 다 지켜보셨을 듯하다”며 농을 쳤던 기억도 난다.
그래도 지금 생각하면 당시 어려운 이민 초창기 생활에서도 부족한 나를 따라 주님의 교회를 개척하느라 고생한 분들에겐 죄송할 따름이다. 또 한 가지 더 놀랍게도 하나님은 내가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15년 동안 강의하며 한국 유학생들을 돌아보도록 하셨다. 나 스스로 지어낸 구실인 줄 알았지만 모두 다 하나님의 계획 아래 있었던 것이다.
‘인생은 사건의 연속이며 삶의 의미는 사건의 해석이다.’ 이 생각은 목회 과정에서 서서히 터득했지만 필라델피아에서의 생활은 이를 더 확인해 준 기간이기도 하다. 부모님 곁을 떠나 남한에 홀로 정착한 나는 목사가 되는 것보다 잠잘 곳이 없으니 우선 기숙사가 있는 학교를 찾았고, 목사가 되면 성수 주일은 저절로 해결될 것 같아 신학교를 찾았다. 그리고 그 신학교에서 나는 세상의 집보다 시편 91편 1절 말씀처럼 ‘본적지’를 찾아가는 과정에 들어섰다. 매 주일 예배를 인도하며 그 과정은 하루하루가 기적이자 현실이 돼가고 있었다. 필라델피아는 내 생애 한 곳에서 제일 오래 거주한 도시가 됐다.
정리=임보혁 기자 bosse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