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서부 새너제이로 이사 후 시카고에서 함께 교회를 섬겼던 조병순 장로님을 다시 만나게 됐다. 조 장로님은 새너제이에 정착한 지 몇 년 된 상태였다. 조 장로님 내외분과 함께 모여 기도하던 교인들을 중심으로 다시금 교회 창립 이야기가 급물살을 탔다. 내가 머물던 아파트와 교우들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지금은 모두 장로 권사가 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지만 당시엔 모두 새신랑 새댁들이었다. 특히 지금은 고인이 되신 안용준 목사님 내외분이 계셔서 큰 힘이 됐다. 안 목사님은 신학교 스승이며 손양원(1902~1950) 목사님의 전기 ‘사랑의 원자탄’을 쓴 저자이시기도 하다.
그렇게 모인 우리는 1980년 서니배일에 있는 한 미국인 교회를 빌려 임마누엘교회의 첫 예배를 드렸다. 마침 그 교회 담임목사는 시카고신학대 동창이라 많은 도움을 받았다. 역시 세밀하게 챙기시는 주님의 손길을 잊을 수가 없다. 몇 달 후 당시 미국 이민 사회의 원로셨던 ‘미국의 소리’ 황재경 목사님을 모시고 첫 부흥 사경회를 가졌다. 1년이 못 돼 네 분의 장로님과 함께 당회가 구성되고 교회의 면모를 갖춰 나갔다. 이후 하나님께서는 믿는 사람을 매달 더해주셨다. 이듬해부터는 여러 조직도 생겨났다. 미국인 성도 모이랜드 부부의 정성과 수고로 주일학교도 시작했다. 이후 산타로사에서 첫 교인 수련회를 열었는데 100명이 넘는 인원이 참석해 뜨겁게 기도하고 예배를 드린, 그 당시 한인교회로서는 흔치 않은 은혜의 모임이었다.
그렇게 서부에서의 교회 개척이 어느 정도 정착될 무렵 또다시 다른 도전을 받게 됐다. 당시 나는 종종 미 동부 필라델피아에서 열리는 ‘SFC-한인기독교대학생운동 여름수양회’나 필라델피아연합교회에서 해마다 열리는 ‘노동자의 날 기념 수양회’에 초청받아 강사로 나섰다. 그 일이 인연이 돼 필라델피아연합교회에서 날 담임목사로 청빙한 것이다.
당시 미국장로교(PCA) 교단에 소속된 한인교회는 두 부류였다. 필라델피아연합교회처럼 미국 노회에 속한 교회와 한인교회들로 구성된 한인노회 소속 교회들이다. 나는 부족하지만 교단 내 한인목회자연합회를 맡고 있었기에 한인교회들과도 직간접적으로 소통하고 있었다. 필라델피아연합교회에서 열린 ‘노동자의 날 기념 수양회’ 마지막 날, 필라델피아연합교회에서는 나에게 “담임 목사님이 사임하셔서 교회가 무척 어려운 상황”이라며 내게 교회를 맡아줄 수 없느냐고 요청해왔다.
나는 망설였다. 우선 서부에 교회를 개척한 지 이제 막 1년이 지나서 다시 옮긴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반면 필라델피아는 복음적인 장로교회가 많지 않은 지역이었다. 무엇보다 정든 교인들이 이 일로 시험에 들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도 됐다. 아니나 다를까 임마누엘교회 식구들은 이 소식을 듣고 내 집을 찾아 간곡히 만류했다. 나는 고민이 많이 됐다. 바로 몇 년 전 시카고에서 교회당 건축을 준비하고 떠나왔는데 그 일을 또 새너제이에서 반복해야 한다는 것에 사실 마음이 매우 무거웠다. 며칠을 기도하며 지내는 동안 많은 생각이 스쳤다. 그럴수록 내 마음속에서는 필라델피아로 가야 하는 이유가 점점 분명히 새겨지기 시작했다.
정리=임보혁 기자 bosse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