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유독물질 아니다” 성급한 발표, 국가책무 저버렸다 판단

입력 2024-02-07 04:05 수정 2024-02-07 04:05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한 민사소송 2심 선고가 열린 6일 오후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이정일(왼쪽), 송기호 변호사가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가습기 살균제 국가 배상책임을 인정한 항소심 재판부는 6일 “문제가 된 화학물질이 별다른 규제 없이 유통·사용돼 지금과 같은 끔찍한 결과를 낳았다”고 정부 측을 질타했다. 정부가 주원료 화학물질 유해성 심사를 충분히 하지 않고 결과를 성급하게 공표한 책임을 물은 것이다. 피해자 측은 승소 판결을 환영하면서 국가는 상고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서울고법 민사9부(재판장 성지용)는 “국가가 가습기 살균제 원료 물질이 유독하지 않다고 고시해 결과적으로 안전성을 보장하는 외관이 형성됐다”고 지적했다. 문제가 된 화학물질은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 등으로 옥시레킷벤키저(옥시)가 제조한 ‘옥시싹싹 뉴가습기당번’의 주원료였다.

재판부는 “환경부 장관 등은 이 화학물질이 음식물 포장재 등에 사용될 것을 전제로 심사·평가한 것으로 보인다”며 “용도 외로 사용되거나 최종 제품에 다량 첨가되는 경우에 관한 심사는 이뤄지지 않았다”고 짚었다. 이어 “해당 물질 자체의 독성 등 유해성이 일반적으로 충분히 심사·평가되거나 안전성이 검증된 것도 아니었는데 ‘유독물 등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일반화해 공표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환경부 장관 등은 해당 물질의 용도 등에 관한 아무 제한 없이 ‘유독물질이 아니다’고 고시할 경우 국민 건강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예견할 수 있었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공무원이 직무 집행에서 법령을 명시적으로 위반하는 경우뿐만 아니라 재량권 행사가 현저하게 합리성을 잃어 객관적 정당성을 상실한 경우에도 국가배상법상 법령 위반에 해당된다”고 밝혔다. 법원 관계자는 “국가배상책임 판단 시 공무원의 권한 행사가 국민 건강과 신체에 미치는 영향, 헌법상 국민보건에 관한 보호의무 등 국가 책무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판결”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1심은 국가 상대 청구를 기각하면서 “역학조사 미실시, 가습기 살균제를 의약외품으로 지정해 관리하지 않은 것, 유해성 심사 등은 모두 당시 시행되던 법령에 따른 것”이라며 공무원의 고의 또는 과실에 따른 위법행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항소심 재판부도 역학조사 미실시와 의약외품 미지정 사유는 1심과 마찬가지로 위법이 아니라고 봤다.

피해자들을 대리한 송기호 변호사는 “국가가 단순히 피해자를 시혜적으로 돕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법적 의무자로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에게 배상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법원이 확인했다”며 “다른 성분 화학물질을 사용한 가습기 살균제 관련 국가 배상 사건에서도 국가책임 인정 판결을 받아내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법원이 위자료 산정 시 가습기살균제피해구제법 등을 통해 이미 보상된 금액을 제외한 점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송 변호사는 “1심부터 10년 가까이 기다린 피해자들의 고통을 생각한다면 국가가 즉시 판결을 수용해 피해자들의 배상을 최종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환경부는 “판결문 검토 및 관계부처 협의 등을 거쳐 상고 여부를 최종 결정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양한주 박상은 기자 1wee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