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 꺾이지 않는 마음

입력 2024-02-07 04:02

“아이들은 병을 고쳐주면 어른보다 훨씬 오래 삽니다.” 학생 시절 교수님의 말씀이 소아청소년과를 지원하는 중요한 동기가 됐다. 그런데, 교수님께서 그 말의 진짜 의미를 전부 설명해 주시지 않은 것 같다. 소아 환자를 진료할 때는 그만큼 긴 시간의 삶이 나에게 책임으로 맡겨진다는 걸. 소아암을 전공하면서 이 말의 무게를 더욱 무겁게 느끼게 됐다.

환자 진료 중에 가장 절망스러운 일은 암이 재발하는 경우다. 길고 힘든 치료를 마쳤는데 모든 걸 다시 시작해야 한다. 게다가 재발 이후의 치료는 처음 치료보다 성공 확률도 낮다. 사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끈질긴 성격이 아니다. 한두 번 시도하다가 안 되면 쉽게 포기하는 성격이다. 하지만 암을 전공하는 의사라면 한없이 끈질겨야 한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책임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6개월 만에 반가운 환자가 찾아왔다. 여섯 살 때 신경모세포종이라는 소아암으로 치료받았던 아이다. 신경모세포종은 소아암 중에서도 특히 공격적이고 치료가 까다롭다. 게다가 아이는 진단 시에 이미 여러 곳으로 전이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소아암의 경우 진행이 많이 된 상태에서도 항암치료로 완치를 기대할 수 있다. 다행히 개구쟁이 꼬마 여자아이는 씩씩하게 치료를 잘 끝냈다. 어른들조차 구토로 꼼짝 못하게 만드는 항암제를 맞고도 깔깔대며 병동을 돌아다니던 꼬마의 웃음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치료를 마치고 5년이 지나면 의학적으로 완치라고 본다. 안타깝게도 아이는 5년째 되던 해에 재발했다. 처음부터 치료가 까다로운 병인 데다가 재발하면 좀처럼 다시 기회가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당시 초등학생이던 아이는 씩씩하게 다시 치료를 끝냈다.

그 아이는 이후로 두 번이나 더 재발했다. 세 번째 재발했을 때는 나도 너무 절망스러웠다. 악성 종양은 재발할수록 완치율이 떨어지기 때문에 세 번째 재발은 정말 절망적인 상황이다. 오후 외래 진료 전에 검사 결과를 미리 확인했는데, 점심도 제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실망하는 아이 앞에서 내가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머뭇거리지 않고 자신 있게 말하는 연습을 했다. “이번에도 잘 치료할 수 있어.”

아이는 이제 고등학생이었다. 암이 뭔지, 항암치료가 얼마나 힘겨운지 잘 아는 나이다. “선생님, 이제 치료받는 거 너무 힘들어요. 또 재발할 거 같아요.” 솔직히, 나도 두렵다. 하지만 내 마음이 꺾이면 이 아이는 누구에게 의지해야 하나. 나는 연습한 대로 단호하게 얘기한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확실하게 끝내보자.” 병원을 나서면 나는 우유부단하고 소심한 아저씨지만, 진료실에서만큼은 강한 사람이 된다. 아니, 강해져야만 한다. 다행히 세 번째 재발 이후에도 새로운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치료를 마치고, 벌써 5년이 훌쩍 지났다.

어린 꼬마로 나를 찾아왔던 아이는 점점 자라서 소녀가 되더니, 이제는 20대 숙녀가 됐다. 유치원 때 시작해서 초등학교, 중고등학교를 거치며 매번 치료받았는데도 학교를 잘 마치고, 요즘은 취업 준비를 위해 학원에 다닌다. 친구들과 여행도 가고, 취미로 제빵을 배운다고 한다.

한편, 겁 많고 쉽게 좌절하던 젊은 의사는 이제 오십대의 제법 능숙한 전문의가 되었다. 육체적으로는 성장을 멈춘 지 오래고, 눈도 침침하고 어깨도 뻑뻑해지는 나이. 하지만 나는 아이들을 통해 같이 성장해 왔다. 내가 맞서는 질병 앞에서 아이들과 함께 더욱 단단한 마음을 지니게 되었다. “아이들은 병을 고쳐주면 어른보다 훨씬 오래 산다”고 하셨던 교수님의 말씀이, 아이들의 삶 속에서 내가 같이 성장할 수 있다는 의미라는 걸 비로소 깨닫는다.

고경남 서울아산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