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헌 1심 유죄… 조직적 사법농단 아닌 ‘개인 일탈’ 판단

입력 2024-02-06 04:05
사진=연합뉴스

‘사법농단’ 의혹의 실무 책임자로 재판에 넘겨진 임종헌(사진)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1심에서 징역형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임 전 차장이 사법행정권을 사유화했다고 지적하면서도 ‘조직적 사법농단’은 없었다고 결론 내렸다. 의혹의 ‘정점’인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최근 1심 무죄 판결을 받은 것과 달리 ‘최상위 실무자’인 임 전 차장에게는 유죄가 선고됐다. 사법농단 사건이 일부 실무자들의 개인 일탈로 마무될 가능성이 커졌다.

서울중앙지법 형사36-1부(재판장 김현순)는 5일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 등 혐의로 기소된 임 전 차장에게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사법농단 의혹으로 기소된 전·현직 법관 중 마지막 1심 판단이었다. 임 전 차장이 재판에 넘겨진 지 5년2개월 만이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국가가 부여한 사법행정권을 사유화해 특정 국회의원이나 청와대를 위한 목적에 이용한 것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 꾸짖었다. 선고 내내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은 채 선고 내용을 듣던 임 전 차장은 판결 직후 재판장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1심은 임 전 차장 혐의 중 박근혜정부 청와대와 일부 국회의원에게 법률 자문을 제공한 혐의 등을 유죄로 인정했다.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 처분 사건에서 청와대 요청에 따라 법원행정처 심의관들에게 사건 당사자인 고용노동부의 재항고이유서 첨삭을 지시한 혐의, 메르스 사태 때 박근혜정부의 법적 책임을 면제할 방법을 심의관들에게 검토하도록 지시한 혐의 등이다.

홍일표 전 의원 정치자금법 사건, 유동수 의원 공직선거법 사건에 대한 법률 검토를 심의관들에게 지시한 혐의도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죄가 인정됐다. 헌법재판소 파견 법관을 통해 헌재서 심리 중인 사건의 비공개 정보를 수집한 혐의, 공보관실 운영비를 불법 편성·집행한 혐의도 유죄로 인정됐다.

재판부는 “피고인의 범죄 행위로 사법부의 다른 국가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이념이 유명무실하게 됐고 국민 신뢰가 저하됐다”며 “사법행정권을 행사하는 법관들이 다시는 피고인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엄중한 책임을 물을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다만 재판부는 지난달 26일 양 전 대법원장 1심 무죄 판결과 마찬가지로 일제 강제징용 손해배상 사건 등 재판 개입 의혹은 무죄로 판단했다. 임 전 차장의 위안부 손해배상, 국정원 댓글 사건 재판 개입 혐의도 인정하지 않았다. 국제인권법연구회 등 법원 내 비판세력 탄압 혐의도 대부분 무죄가 선고됐다.

재판부는 “수사 초기 언론을 통해 국민 뇌리에 깊이 각인됐던 사법농단이나 재판 거래에 관한 중대한 의혹들은 수많은 검사들이 투입돼 그 결과가 300쪽 넘는 분량의 공소사실로 정리됐지만, 대부분 실체가 사라진 채 ‘심의관에게 부적절한 보고서를 작성하게 했다’는 직권남용죄로 남게 됐는데 이것도 대부분 죄가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어 “유죄로 인정된 범행도 피고인이 단독으로 저지른 범행이거나, 예산 관련 범행에 지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임 전 차장이 유죄 판결을 받으면서 사법농단 사건에 연루돼 기소된 14명 전·현직 법관 중 유죄가 선고된 이는 3명이 됐다. 이 중 임 전 차장 형량이 가장 무겁다.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이 2심에서 벌금 1500만원을, 이규진 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은 2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현재 상고심이 진행 중이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