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오너가(家) 기업들이 복잡한 승계 셈법을 놓고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일감 몰아주기나 편법 등을 동원해 승계하기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결국 상속세 또는 증여세를 내는 ‘정공법’을 택할 수밖에 없는데, 수천억원에 달하는 세금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 수 있어 이 방법도 선택하기는 쉽지 않다. 이런 이유로 오너가 기업은 3·4세 자녀들에게 경영권을 넘기면서도 증여 등 지분 정리는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그러나 안정적 기업 경영을 위한 지분 정리가 투명하게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 뒤따른다.
지분 정리, 안 하나 못 하나
경영권 이양은 완성 단계에 접어들었으나 지분을 넘기지 못하고 있는 곳으로는 한화그룹이 대표적이다. 지주사격인 ㈜한화를 보면 지난해 9월 말 기준 김승연 한화 회장의 지분율은 22.65%에 달한다. 김 회장의 장남 김동관 한화 부회장은 4.91% 지분을 보유 중이다. 둘째 김동원 한화생명 사장과 셋째 김동선 한화갤러리아 부사장은 각각 2.14%, 2.14%를 보유했다.
삼형제의 지분율 9.19%도 작지 않은 규모지만, 향후 경영권을 완전히 넘겨받아 회사를 이끌어나가기 위해선 김 회장이 보유한 지분 정리가 필요한 상황이다. 그나마 한화는 승계 시나리오 밑그림이 그려져 있다. 김 부회장이 한화솔루션을 중심으로 에너지·우주·항공·방산 부문을 맡고, 김 사장이 금융 계열사를, 막내는 호텔과 리조트를 담당한다는 구상이다.
재계에선 승계 완성에 앞서 삼형제가 지분 100%를 보유한 한화에너지와 ㈜한화의 합병이 먼저 이뤄질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이를 통해 삼형제의 ㈜한화 지분율을 최대한 끌어올릴 것이라는 분석이다. 삼형제의 한화에너지 지분율은 김 부회장이 50%를 차지한다. 김 사장과 김 부사장은 각각 25%다. 한화에너지는 호남 지역 전기 공급 사업자면서 태양광, 액화천연가스(LNG) 등 발전 사업을 하는 기업이다. 한화에너지는 ㈜한화 지분도 9.7%가량 보유 중이어서 두 회사의 합병만으로도 삼형제의 ㈜한화 지분율이 상승하는 효과가 나타난다.
여기선 합병비율이 중요한데, 비상장사인 한화에너지 기업가치를 얼마로 보느냐가 관건이 될 전망이다. 다만 한화그룹 관계자는 5일 “한화에너지와 ㈜한화 간 합병이나 승계를 위한 작업은 현재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HD현대도 비슷한 상황이다. 경영권 승계 구도는 어느 정도 정리됐다. 정기선 부회장을 차기 총수로 하는 시나리오다. 여동생인 정남이 아산나눔재단 상임이사나 막내 정예선씨는 HD현대에 적을 두고 있지 않다. 역시 관건은 그룹 총수이자 정 부회장 등 남매의 아버지인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이 보유한 HD현대 지분(26.60%)을 어떻게, 누구에게로 넘기느냐다. 정 부회장은 지분 5.26%로 개인 2대 주주지만, 최대주주로 올라서기 위해선 정 이사장으로부터 지분을 받아야 한다. 동생들은 HD현대 지분이 없어, 증여하게 된다면 정 부회장이 독식하거나 상당 부분을 가져가게 될 공산이 크다.
코오롱그룹도 마찬가지다. 이웅열 명예회장이 보유한 49.74%를 지분이 하나도 없는 이규호 부회장에게 어떻게 넘겨줄지가 숙제다. 1984년생 외동아들인 이 부회장은 연말 인사에서 지주 전략부문 대표이사를 맡으며 본격적으로 경영 전면에 나섰다.
복잡한 변수에 꼬이는 승계 구도
4대 그룹 중에선 SK그룹의 승계가 가장 복잡하다. 총수이자 최대주주인 최태원 회장(SK㈜ 지분 17.73%)은 최근 승계 고민을 부쩍 많이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 회장은 지난해 10월 프랑스 파리에서 진행된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승계와 관련해 “정말 많은 생각을 하고 있고 준비를 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그는 “나만의 계획이 있지만 아직은 공개할 때가 아니다”라고 했다.
최 회장의 세 자녀가 주요 계열사에서 근무하고 있으나 20~30대로 어리고 지분이 하나도 없어 주식을 넘기는 데 어려움이 예상된다. 또 배우자인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과의 이혼소송과 재산 분할 문제도 변수다. 사촌동생인 최창원 SK디스커버리 부회장을 그룹의 컨트롤타워인 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에 앉힌 것도 승계 구도에 필요한 밑그림이라는 해석도 있다.
현대모비스→현대차→기아→현대모비스 등으로 이어지는 순환출자구조인 현대차그룹은 순환출자 해소와 함께 정몽구 명예회장 지분을 정의선 회장이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넘겨받을지가 난제로 꼽힌다.
최근 LG가의 상속 분쟁이나 홍라희 전 리움 관장 등 삼성가 세 모녀의 잇따른 삼성그룹 주식 매각은 모두 ‘사후 상속’ 뒤 세금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따라서 다른 주요 그룹은 오너 생전에 승계와 세금 문제를 해결하려 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일각에선 스웨덴 발렌베리 가문의 모델을 도입하는 재벌 그룹이 나올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실제 삼성은 고(故) 이건희 선대회장 생전에 이 모델을 검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재단을 만들어 재단에 오너 유산을 넘기는 방법인데 이렇게 하더라도 현행 상속세 및 증여세법으로는 지분 5%까지만 면세되고 5% 초과분은 60%의 세금을 내야 한다.
재계 고위 관계자는 “주요 그룹에서 컨설팅사를 통해 발렌베리식 승계를 검토했으나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한국의 특성상 정착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며 “오너들과 핵심 경영진이 경영권 분쟁 여지부터 세금 문제까지 대응 전략을 짜느라 고민이 깊다”고 말했다.
김민영 기자 my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