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그것도 전액 장학금을 받고 유학을 간다니 꿈만 같았다. 열두 살 때 만난 목사님이 해주신, 미국에 가면 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는 늘 내 마음 한쪽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홀로 남한으로 내려와 고무신 한 짝이 가진 것 전부였던 지난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15년간 홀로 한국에 살면서 너무 고생했기에 당시 난 서울이라면 지긋지긋했다.
어렵사리 얻은 유학의 기회였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당시는 부부가 함께 외국 유학을 떠나기가 쉽지 않은 때였다. 게다가 아내는 임신한 지 4개월쯤 됐다. 이미 사산과 유산의 아픔을 두 차례 겪었기에 몸조리에 전념해야 할 때였다. 결국 일단 나 홀로 유학길에 오르고 아내는 나중에 안정을 취한 뒤 건너오기로 했다. 학기는 이미 그해 9월 시작했지만 여러 여건상 이듬해 1월 도미하게 됐다. 당시 편도 비행기 삯만 500달러였다. 이제 막 교회를 개척하고 자리 잡은 목회자에게는 큰돈이었다. 빚을 내고 교인들의 도움을 받아 1967년 1월 7일 유학길에 올랐다. 김포공항 건물 위층 환송장에서 날 배웅해주던 교인들의 모습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아내는 그때도 차마 마중을 나오지 못했다.
미국 국적 항공기를 타고 시애틀을 거쳐 신학교가 있는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 도착했다. 생경한 풍경에 놀라거나 신기해할 새도 없이 험난한 미국 생활, 그것도 유학 생활이 시작됐다. 학교 공부를 따라가기에도 벅찰 때였다. 난 도무지 교수의 강의 내용을 알 수가 없었다. 이미 학기가 시작한 1월 중순인 데다 당시 한국의 영어 교육은 주로 문법과 작문에만 치중할 때였고 의사소통 수준의 영어 실력으로는 어려운 대학원 수업을 따라가기는 한계가 있었다.
한 번은 구약 선지서 시간이었는데 교수가 “마이카, 마이카”라면서 설명했다. 난 속으로 ‘성경 시간에 왜 자동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가 없네’ 하고 생각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선지자 ‘미가’를 영어로 그렇게 발음한다고 했다. 또 내 딴엔 열심히 강의 내용을 필기했는데 나중에 날 도와준 친구가 쓴 필기 노트와 대조해보니 완전히 엉뚱한 걸 쓰고 있었다는 걸 깨달을 때도 있었다. 웃지 못할 영어 실력으로 유학 생활을 시작한 셈이었다.
그렇게 2년간 석사과정을 마칠 무렵 학교와 여러 지인의 도움으로 아내가 미국으로 건너올 수 있었다. 아내가 오기로 한 시간에 맞춰 공항에 마중을 나갔다. 한참을 기다렸는데 아무리 봐도 보이질 않았다. 당시는 전화 통화도 힘들 때라 결국 집으로 다시 돌아갔다. 비행기를 갈아타는 시애틀에 아는 지인에게 전화해 혹시 공항에 아내가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해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답답한 마음에 아는 미국인 친구에게 사정을 전했다. 그 친구가 이곳저곳 알아보더니 아내는 환승 시간이 촉박해 시애틀에서 시카고로 오는 비행기를 놓쳤던 것이었다. 다행히 항공사에서 다음 비행기를 탈 수 있도록 아내가 호텔에 머물 수 있게 배려해줬다는 걸 알게 됐다. 다음 비행기가 오는 시간에 맞춰 밤 10시 무렵 환영 현수막을 들고 공항에 나갔지만 그때도 아내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정리=임보혁 기자 bosse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