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성형 인공지능(AI) 열풍이 산업 전반의 패러다임을 뒤흔들고 있다. 한국의 주된 먹거리였던 반도체산업도 AI 열풍을 타고 제2의 부흥기를 맞기 위한 전략에 사활을 걸고 있다. 국내 반도체 기업은 AI 시대 미래 먹거리 확보를 위해 고성능 첨단 반도체를 적기에 개발한다는 청사진을 앞다퉈 내놨다.
하지만 한국 정부의 진흥정책은 미흡하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세계 각국이 반도체 공급망 핵심축이 되기 위해 대대적인 보조금 경쟁에 나선 가운데 세계적 기업을 보유한 한국은 지원 규모가 경쟁국에 크게 못 미치기 때문이다.
AI발 반도체 부흥의 시대
1990년대 PC가 보급되고 인터넷이 등장했고, 2000년대 스마트폰 보급이 확산됐다. 이제는 생성형 AI가 일상에 스며들며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산업 지형도가 펼쳐질 것이라는 관측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반도체는 AI 시대의 핵심산업으로 다시 한번 부상하고 있다. 김정호 카이스트 전기·전자공학부 교수는 30일 “생성형 AI가 산업을 이끄는 흐름이 앞으로 30년간은 이어질 것”이라며 “PC와 인터넷, 스마트폰이 발달하면서 반도체가 성장했듯 AI가 반도체산업을 또 한 번 성장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글로벌 경기침체 여파로 혹한기를 겪었던 반도체산업은 AI 열풍에 힘입어 회복기에 접어들었다. 지난달 세계반도체무역통계(WSTS)에 따르면 지난해 반도체 시장 규모는 전년 대비 9.4% 감소했다. 하지만 올해는 13.1%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글로벌 기업들이 대규모언어모델(LLM)을 개발하고 생성형 AI를 학습시키기 위한 그래픽카드(GPU) 수요를 끌어올리면서 반도체 시장이 다시 성장할 수밖에 없다는 예측이다. 시장조사업체 가트너는 올해 반도체 시장 매출 규모가 전년 대비 16.8% 증가한 6240억 달러에 육박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가운데 올해 AI 반도체 시장 규모는 지난해보다 25.6% 성장한 671억 달러에 달할 전망이다.
다시 뜨는 메모리반도체
AI가 원활하게 작동하기 위해서는 고성능 메모리반도체가 필요하다. AI를 학습시키고 성능을 개선하기 위해선 대용량의 데이터를 빠르게 처리하면서 전력소비가 적은 메모리를 가동해야 한다. 현재 생성형 AI에 가장 적합한 메모리로 불리는 제품은 고대역폭메모리(HBM)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사실상 독점적인 기술력을 확보한 상태다.
생성형 AI는 개인 맞춤형 기술로 성장할 전망이다. 특정 기능이나 개인, 기업 특성에 맞춰 설계된 AI가 일반화된다면 이에 맞는 전용 반도체 수요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이때 한국 기업은 엔비디아 같은 기업과 협력해 특정 AI 칩에 특화한 HBM을 개별적으로 개발하는 식으로 반도체 생태계를 장악할 수 있다. 한국이 경쟁력을 갖춘 메모리 분야의 중요성이 AI 시대에 더 커지는 만큼 글로벌 반도체 패권을 쥘 기회도 한층 더 가깝게 다가왔다는 분석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이미 반도체산업의 무게중심에 변화가 시작됐다고 보고 대대적인 투자에 들어갔다. 경계현 삼성전자 DS부문장(사장)은 “생성형 AI 시대에 HBM 같은 고용량의 메모리반도체 수요가 더욱 커지고, 새로운 인터페이스(통신 규격)를 통해 반도체를 효율적으로 활용하려는 시도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HBM 생산량을 대폭 늘리겠다는 계획이다.
곽노정 SK하이닉스 사장도 ‘메모리 센트릭 AI 시대’가 왔다고 강조한다. 메모리 센트릭은 메모리반도체가 중심 역할을 하는 환경을 뜻한다. 곽 사장은 “AI 시스템의 성능 향상 여부는 메모리에 달렸다”면서 고객 특화 AI 메모리 솔루션을 제공하는 데 경쟁력을 갖추겠다고 밝혔다.
반도체 국가 대항전
반도체산업 육성을 위해 기민한 움직임을 보이는 글로벌 국가들과 달리 한국 정부는 상대적으로 느긋한 모습이다. 올해 들어 정부는 2047년까지 세계 최대 규모의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를 경기도 남부 지역에 조성하겠다는 데 일조하겠다는 청사진을 내놨지만 민간부문에 대한 직접적인 투자계획은 전무하다. 정부보조금 투입 없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622조원을 투자하는 동안 정부는 인프라 구축 및 투자환경 지속 개선에 간접 지원하겠다는 데 그치고 있다. 지난 23일 HBM을 국가전략기술에 포함시켰지만 이를 통해 받을 수 있는 세제혜택은 연구·개발(R&D) 비용의 30~40%(대기업 기준)에 불과하다.
반면 경쟁국들은 정책자금 투입을 통해 반도체 육성에 사활을 걸고 있다. 일본은 글로벌 공급망에 주축이 되겠다며 보조금을 앞세워 대만 TSMC 반도체 공장을 유치했다. 일본 정부는 TSMC 구마모토현 1공장 건설에 4760억엔(약 4조3000억원)의 보조금을 지급했다. 이는 TSMC 투자비용(약 11조5000억원)의 40% 수준이다. TSMC 2공장 지원금액으로 최대 10조원을 투입한다는 방침이다.
독일 역시 인텔 반도체 공장을 유치하기 위해 100억 유로(약 14조원)의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미국은 반도체 설계에서 제조까지 책임지는 클러스터화를 추진하기 위해 390억 달러(약 52조원)에 달하는 보조금을 내걸었다.
한국이 반도체 패권경쟁에서 ‘기울어진 운동장’ 환경에 직면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현재와 같은 지원에 그칠 경우 국내 기업의 원가경쟁력이 떨어져 자칫 반도체 약소국으로 지위가 추락할지 모른다. 한국도 보조금 지급을 고민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전성필 기자 fe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