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명→8000명 회심 ‘기적’도
지난 10일 서울 구로구의 한 빌라. ‘국가 유공자의 집’ 문패가 걸린 현관문을 열자 김재근(94) 목사가 인사를 건넸다. 구순을 훌쩍 넘은 된 김 목사는 6·25전쟁과 월남전이 마치 어제 일인 것처럼 기억에서 생생하게 끄집어냈다.
“포탄이 막 날아오는데 혼비백산이었어요. ‘아 여기서 죽겠구나’ 싶었죠. 바위가 눈에 띄어 그쪽으로 몸을 피하고 계속 기도했죠.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수십여분 정도 지났을까요. 밖에 나오니 생존한 사람이 많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건져주셨단 그 생각이 가장 먼저 들더라고요.”
김 목사는 6·25전쟁 한복판에서 전후방 가릴 것 없이 군 최소의 단위 부대인 분대부터 사단까지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수없이 기도했다. 용기 있게 싸우고 생명을 보호해달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했던 그의 진심이 통했을까. 신앙이 없던 병사들도 그를 찾아와 자신을 축복해달라고 예수님을 믿고 싶다고 했다.
1953년 김 목사가 8사단에 배치됐을 때에는 1만1000여명 가운데 8000여명이 기독교 신자로 회심하는 ‘사건’도 있었다. 김 목사는 “당시 사단장에게 ‘지금처럼 혼란스러울 때야말로 군인이 복음으로 정신무장을 해야 한다’고 전했다”며 “그렇게 사단장 승인을 받아 연대 군목과 함께 매일같이 전도 강연을 펼쳤다. 1년 뒤 마지막 브리핑할 때 불과 200명도 안되는 신자는 8000명이 됐다”고 설명했다. 마치 오병이어 같은 기적을 전쟁터에서 경험한 것이다.
출전 직전에 ‘군종목사’ 인사 명령
“신학교 마지막 2학기를 마치지 못하고 소집을 받아 닷새간 훈련소 기초훈련을 받고 즉시 전선에 투입됐습니다.수많은 전사자를 보면서 제 죽을 날을 기다렸죠. 다시 가족과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살아남았고 가족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죠.”
지난 26일 경기도 용인의 자택에서 만난 채규락(101) 목사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6·25전쟁 당시 상황을 전했다.
1952년 9사단에 배치된 채 목사는 군사적 요충지였던 백마고지를 지키는 임무를 맡게 됐다. 어느 날 전선으로부터 귀순한 북한군이 적의 주요정보를 제공했다. 백마고지 일대에 북한군이 총공격 해온다는 첩보였다. 첩보는 사실이었고 이는 백마고지 쟁탈전으로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채 목사가 속해 있던 3개 대대가 백마고지에 진출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전 장병은 사지로 향하는 심정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연대본부로부터 군종 목사 인사명령이 떨어졌으니 제대하라는 특명이 왔다. 채 목사는 “당시 백마고지 전투에 임하려고 출동준비에 분주한 전우들과 비애와 감격이 뒤섞인 가슴을 안고 석별의 악수를 하고 떠났다. 그렇게 죽음의 골짜기에서 하나님이 나를 꺼내 가셨다”고 고백했다.
‘6·25전쟁 참전 1호 군목’이 된 채 목사는 전장을 누비면 장병들의 용기를 북돋아 줬다. 그는 “옆에 있던 참모나 지휘관이 포로가 되기도 했고 후퇴할 때는 1개 사단이 1개 대대로 줄어들 만큼 절체절명의 상황도 겪었다. 돌이켜보니 순간순간 나를 지키신 분은 하나님이셨고 모두 은혜였다”고 회고했다.
군목, 희망과 소망의 전령사
인터뷰 말미. 합친 나이 195세의 두 원로 군목이 일선의 후배 군목들에게 전하는 조언은 기자의 마음까지 먹먹하게 만들었다.
“나라를 지켰단 사실만으로 후회하지 않습니다. 제 사명이니깐요. 사람들은 희망과 소망을 바라보고 삽니다. 그 희망과 소망은 주님의 복음에서 비롯됩니다. 우리 군목들이 영적·정신적으로 장병에게 힘을 주고 용기를 전해야 합니다. 사랑합니다.”(김재근 목사)
“우리는 누구나 인생을 복되고 성공적으로 살기 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역사 한 페이지를 기록할 만한 공적이 없어도 삶의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세운다면 사도 바울처럼 하늘에서 의의 면류관이 예비돼 있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군목이 나서서 군 장병의 삶을 하나님 앞에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주세요.”(채규락 목사)
용인=글·사진 김동규 기자 kky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