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사법농단’ 의혹은 2017년 2월 불거져 전현직 법관 100여명이 수사 선상에 오르는 등 사법부에 깊은 상처와 혼란을 남겼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에 대한 판결은 1심 결과이긴 하나 대법원 법원행정처 일부 고위 법관들이 일부 부적절한 사법행정권을 행사한 측면은 있지만 전직 대법원장 포함 14명을 먼지떨이 식으로 재판에 넘길 사안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는 지적이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뒤를 이어 취임한 김명수 전 대법원장은 법원행정처 축소, 고등법원 부장판사 제도 폐지, 법원장 후보 추천제 도입 등 사법행정권을 최소화했다. 법원 내 수평적 문화가 정착됐지만 재판지연 등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했다는 지적도 받는다. 조희대 대법원장이 전임 대법원장들을 반면교사 삼아 무리한 사법행정권 행사는 자제하고, 재판의 질과 속도를 높이기 위한 방안에 집중해야 한다는 조언이 나온다.
사법농단 의혹의 후유증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사건 이후 법원 내 실력 있는 법관들이 대거 법원을 떠났다. 서울 지역의 한 부장판사는 28일 “주축으로 일해야 할 법관들이 퇴직해 사실상 기존 법원은 해체됐다”며 “대법원장이 인사권을 행사하려 해도 선택의 여지 자체가 없어진 상황”이라고 말했다. 판사 출신 한 변호사는 “모든 법관이 훌륭하지만, 더 유능하고 법원에 큰 역할을 해야 할 사람들은 분명 있는데 그런 사람들이 많이 떠났다”며 “남은 사람들도 이 조직이 정말 내가 평생 몸 바칠 조직인가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다”고 말했다.
사법농단 의혹 대처 과정에서 법원은 사실상 두 쪽으로 갈라졌다. 형사처벌 사안이 아니기 때문에 내부 징계와 인사 조치로 해결해야 한다는 쪽과 수사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는 쪽이 부딪혔다. 김 전 대법원장은 2018년 6월 검찰 수사에 협조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사법농단 의혹 제기와 확산에 앞장섰던 판사들은 문재인정부 청와대에 입성하거나 더불어민주당에 입당했다. 이탄희 이수진 최기상 의원이 법복을 벗고 정치에 입문했다. 김형연 전 판사는 사표 제출 이틀 만에 문재인정부 청와대 법무비서관으로 직행해 논란이 일었다. 부장판사 출신 한 변호사는 “사법농단을 단죄해야 한다는 분위기를 특정 세력이 광풍처럼 몰아간 것”이라고 지적했다.
양 전 대법원장이 47개 혐의 무죄를 선고받은 상황에서 법원 안팎에서는 조희대 대법원장 리더십이 중요해졌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번 판결을 전임 대법원장들의 잘못은 개선하고, 법원 내 갈등을 치유·봉합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재경지법의 한 판사는 “양 전 대법원장 체제 때 임종헌 법원행정처 차장이 무리하게 여러 일을 추진했던 것은 사실”이라며 “조 대법원장이 반면교사 삼아야 할 부분”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변호사는 “재판 결과가 바뀌진 않았다 해도 재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시도를 했다는 것은 헌법적 가치에선 부적절한 일”이라며 “반성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김 전 대법원장 체제와 달리 법원행정처 역할 확대는 불가피하다는 의견도 있다. 대법원이 일선 법원의 재판 지연을 방치하다시피 해선 곤란하다는 시각이다. 재경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재판이 지연되고 국민적 비판이 쏟아지는데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가 방관하는 건 직무유기”라고 말했다. 수평적 문화를 강조했던 김 전 대법원장 체제의 문제점을 정확히 분석해 열심히 일하는 판사들을 독려하고 재판 지연을 개선하는 역할은 여전히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나성원 양한주 기자 na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