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 가지 못하게 막는 선임하사에게 대들며 “육군본부(육본)에 아는 사람이 있다”고 거짓말할 때는 몰랐다. 실제로 육본으로 가게 될 줄은 말이다. 당시 난 통역장교 자리에 관심이 있었다. 그러던 차에 과거 춘천제일장로교회에서 알게 된 원익환 형님의 동생 원시환씨께서 부대 통역장교로 오셨다. 하나님의 앞서 준비하심이란 놀랍다. 그분은 자신의 친구가 근무하는 육본 조달감실 부관으로 내가 갈 수 있도록 추천해주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원시환씨께서 평소 바둑을 같이 두던 인사 책임자에게 날 추천한 거였다. 공교롭게도 교회 가려는 날 막았던 그 선임하사를 훗날 육본에서 실제로 만났다. 무슨 도움을 요청하러 온 것인데 오죽 답답했는지 날 붙잡고 도와달라며 읍소하는 모습을 보니, 정말 소신을 밝히려면 처음부터 밝혀야지 나중에 가서 바꾸면 힘들 수도 있겠다는 걸 깨달았다.
군 제대 후 육본에서 문관(군무원)으로 잠시 근무를 이어가게 됐다. 저녁 시간에는 여유가 생겼다. 단국대 야간대학 과정이 눈에 들어왔다. 당시 총회신학교는 학사 학위를 받기가 어려웠던 터였다. 다행히 신학교에서 2년 반 정도 공부한 이력을 인정받아 영문과 3학년으로 편입할 수 있었다. 이후 졸업해 준교사 자격증을 받은 나는 고민에 빠졌다. 신학교를 마저 졸업할지 아니면 교사로 안정적인 생활을 할지 고민이 컸다. 당시는 1961년 박정희의 군사쿠데타인 5·16군사정변 직후라 학교에 빈 교사 자리가 많았다. 박정희가 정권을 잡으며 군대에 가지 않은 교사들은 모두 내쫓았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도 신학교를 가라는 이와 교사를 하라는 이로 의견이 갈렸다. 당시 총회신학교 교무과장이셨던 한철하 교수님께 장문의 편지를 보내 조언을 구했다. 한 교수님의 존함은 과거 춘천에서 방황하던 시절 우연히 동인지 ‘야성(野聲)’에서 처음 본 후 인상이 깊어 기억하고 있었다.
한 교수님은 답장에서 “이왕 신학을 시작했으니 끝을 보라”고 조언하셨다. 그렇게 신학교로 돌아간 그 무렵 겪은 일화 하나가 기억이 난다. 군 제대 후 육군본부에서 문관으로 잠시 근무한 후 춘천 성수상업고등학교에서 영어 교사를 할 때 일이다. 내가 담임을 맡은 반 학생 한 명이 있었다. 한 번은 숙제를 안 해온 학생들을 벌을 주는데 다른 아이들은 다음 시간엔 꼭 해오겠다고 약속했는데 그 아이만은 그러지 못하겠다며 대들었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 다음에도 못 해올 것이 뻔한데 거짓말은 못 하겠습니다. 계속 벌 받겠습니다.”
당시 담임교사는 월사금을 내지 못 한 학생의 집을 방문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그 학생 집을 방문해보니 부모님은 안 계시고 나이 많은 할머니와 함께 사는데 도저히 학교 다닐 형편이 아니었다. 착잡한 마음으로 돌아왔지만 이후 그 학생은 볼 수 없었다. 세월이 흘러 신학교에 다니던 나는 청량리역에서 택시를 합승해 타고 태릉에서 내릴 일이 있었다. 계산하려는 내게 택시운전사가 “그냥 내리시라” 했다.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러자 그는 “오래전 성수상고 다닐 때 선생님 반 학생이었다”며 “그때 선생님이 계속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한 말을 잊지 않고 살아간다”고 말했다. 그 말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정리=임보혁 기자 bosse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