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11월 중순 날이 제법 쌀쌀해지기 시작할 무렵 병원에서 퇴원했다. 그러나 일가친척 하나 없는 남한 땅에 혈혈단신 던져진 내가 갈 곳은 없었다. 서울 종로구 효자동의 병원에서 나와 하염없이 걷다 보니 광화문의 중앙청사(구 조선총독부 청사)에 이르렀다. 길 한쪽에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서 있었다. 멋도 모르고 일단 사람들 뒤에 따라 섰다. 군용 트럭 등을 수리하던 미군 부대에서 일할 사람을 뽑는 줄이었다. 서양 사람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운이 좋게 뽑힌 난 군용 트럭을 타고 당시 부대가 주둔한 용산구 남정국민학교로 갔다. 다음 날 아침 통역관이 영양실조로 비쩍 마른 날 보더니 “넌 여기서 일 못 할 것 같다”며 돌아가라고 했다. 난 통역관의 다리를 끌어안고 “여기서 돌아가면 전 갈 데가 없어요!”라며 애원하듯 매달렸다.
내 처지가 딱했는지 그 통역관은 내게 변소(화장실)라도 청소하라며 소일거리를 줬다. 화장실에 휴지가 있는 건 그때 처음 봤다. 교회 다닐 때 예수님이 말 구유에서 태어나셨다는 성경 구절이 생각났다.
‘왕이신 예수님도 이런 곳에서 태어나셨다는데 맡은 일에 일단 최선을 다하자’고 마음먹었다. 변소 청소를 깨끗이 하고 미군이라도 만나면 잘 모르는 영어로 연신 “생큐” “생큐” 하며 살갑게 대했는데 이를 부대에서 좋게 봤는지 6개월 뒤 사무실 청소 담당으로 나름 진급도 하게 됐다.
당시 나는 한 미군 상병을 ‘미스터 홀(Hall)’이라 부르며 곧잘 따랐는데 그가 어느 날 “미국에 같이 한 번 가볼래” 하며 물었다. 하지만 당시 내 유일한 소망은 빨리 이북으로 올라가 부모님을 만나는 것이라 거절했다.
이후 난 부대를 따라 강원도 원주로 이동하게 됐다. 주일이면 나는 미군 차를 얻어 타고 춘천제일장로교회에 출석했다. 그곳에서 나보다 두 살 많은 원익환 형님을 알게 됐다. 3형제였던 그분의 가족은 날 잘 챙겨주셔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러던 중 53년 7월 무렵 드디어 전쟁이 끝났다. 정전협정이 이뤄진 것이다.
휴전 후 부대를 나온 나는 춘천제일장로교회 종탑 밑에 있는 작은 ‘하꼬방’(판잣집)에서 제2의 남한 생활을 시작했다. 사람이 거주할 만한 곳은 아니었지만 그마저 감사했다. 당시 교회에서는 야간반으로 ‘성경구락부’를 운영했다. 초등학교도 못 마친 이들을 가르치는 학교와 같은 곳이었다. 전쟁 전 중학교라도 다녔던 나는 그곳에서 선생 겸 허드렛일을 하며 지냈다.
미처 못 마친 학업도 다시 이어가게 됐다. 당시 야간제로 운영되던 춘천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된 것이다. 원익환 형님과 학교에서 만난 여러 친구의 도움 덕분에 신앙생활도, 학교생활도 이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는 전쟁 직후라 학교 건물이라고 해봐야 천막에 불과했다. 먹을 것도 구하기 힘들 때라 매일 학교에 나갈 여건이나 형편도 못 됐다. 계속해서 이렇게 살아야 하나 싶던 차에 다니던 교회에서 서울 남산 아래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결국 ‘다시 서울로 올라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리=임보혁 기자 bosse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