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림택권 (7) 열악한 환경에 쓰러져 병원 신세… 본격 남한 생활 시작

입력 2024-01-24 03:06
림택권 목사가 1967년 미국에서 목회할 당시 한국 기독신보사의 논설위원으로도 활동하면서 받은 사원증. 오른쪽은 1951년 남한에 정착한 림 목사가 이후 서울시로부터 발급받은 시민증.

인천 백령도에 머물 땐 좋지 못한 위생 환경 탓에 곤욕을 치렀다. 박테리아에 감염된 디프테리아 병을 앓아 고생했다. 또 요즘 한국에도 이가 다시 나타나 한동안 걱정이 컸다는데, 당시 백령도에 머물 때도 이 때문에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인근 학교의 마룻바닥에 멍석 등을 임시로 깔고 잤는데 바닥에서는 냉기가 올라왔고, 이가 살결이 닿는 곳마다 들러붙어 몹시도 가려웠던 기억이 있다. 밥도 밀로 만든 조그마한 주먹밥에 돌소금 반찬이 전부였다. 그러다 결국 난 지쳐 쓰러졌고 1951년 7월 무렵 응급차를 타고 경기도 의정부의 한 병원으로 이송됐다. 당시 얼마나 사경을 헤맸으면 지금도 어떻게 넘어왔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후 서울시립병원의 효시가 된 ‘순화병원’에 머물며 본격적인 남한 생활이 시작됐다. 당시 서울은 전쟁으로 쑥대밭이 됐다. 많은 이들이 피난을 떠나 휑했다. 하지만 청계천 물만은 맑았던 기억이 난다.

내가 머물던 병원에서는 밤새 죽어 나가는 이들이 많았다. 밤이 되면 곳곳에서 “바케스 미즈!”라며 절규하는 소리가 온 병원에 울려 퍼졌다. 물 좀 달라는 소리였다. 그렇게 날이 새면 옆방의 누가 죽었다는 소리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전쟁통에도 사랑은 꽃핀다고 그랬던가. 당시 병원에는 인근 배화여고 여학생들이 봉사활동을 나왔다. 그중 한 여학생이 어찌나 친절하게 대해주던지 가슴이 설렜다. 그 여학생은 배가 고프다는 나를 위해 떡을 사와 건네주기도 했고, 고향에서 교회를 다녔다는 내 말에 자신도 교회를 나간다며 날 위해 기도해주겠다고도 했다. 그 학생의 이름도 적어놨는데 남한에서 나그네 신세와 다름없던 탓에 어느새 잃어버려 지금도 아쉽다.

열이 좀 내리며 회복된 난 당시 동대문에 있던 한 감리교회에 나가 종종 예배를 드렸다. 그러던 어느 날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데 한 권사님이 나를 찾아오셨다. 그러더니 대뜸 쌈짓돈을 건네주셨다.

그 권사님은 “피난 가는 가족에게 주려던 돈인데 미처 전해주지 못했다”며 “학생을 보니 안타까운 마음도 들고 해서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더벅머리를 하고서는 아픈 몸을 이끌고 예배에 나오는 내 모습이 무척 가여워 보였나 보다. 많은 돈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너무나 감사했고 권사님의 따뜻했던 마음은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그해 11월 중순이 되자 병원에서는 이제 다 나았으니 퇴원하라고 했다. 연고지 하나 없이 갈 곳 없던 나는 그렇게 다시 추운 겨울을 앞두고 거리로 나왔다. 효자동 길거리 한복판에 홀로 남겨진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단벌옷과 담요 하나, 검정 고무신 한 짝이 전부였다.

일가친척 하나 없는 남한에서 잠잘 곳이 없어 서울에서 인천까지 걸어간 적도 여러 번이었다. ‘하나님이 왜 날 이렇게 고생을 하게 하시나’ 하는 마음으로 멀리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볼 때가 많았다. 그래도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하면서 암송한 시편 73편 28절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다”라는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새 힘을 얻었다.

정리=임보혁 기자 bosse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