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림택권 (5) 인민군으로 징집… 총도 없이 행군만 하다 몰래 도망쳐

입력 2024-01-22 03:04
경북 칠곡군 가산면 호국로 다부동전적기념관 다부동전투 전적비 모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공

북한군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은 열여섯 살 나이로 이제 막 중학생 티를 벗으려던 나와 친구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꿨다.

그해 8월부터 9월까지 경북 칠곡군 가산면 일대에서 벌어진 ‘다부동 전투’는 6·25전쟁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로 평가받는다. 이 전투에서 북한 인민군은 거의 몰살됐다고 한다. 당시 전투는 대한민국 국군이 대구로 진출하려던 인민군의 대공세를 저지하고 그 기세를 꺾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 영향으로 만 14세가 넘는 북한 남자는 모두 인민군으로 징집됐다.

사실 6·25전쟁 발발 직전부터 전쟁을 준비하는 비밀단체가 있었다고 한다. 훗날 날 ‘택권동무’라 부르던 내 친구도 거기에 속해 있었다고 들었다. 6·25전쟁이 터진 직후 징집된 그 친구는 이후 소식이 끊겼다.

나 역시 징집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징집 통보를 받은 그 날 읍사무소를 찾았다. 하지만 징집 절차가 길어지며 난 일단 귀가 조처됐다. 저녁이 돼서야 20리 정도 떨어진 집에 도착하니 혼인 후 출가해 전도사로 사역하던 누님이 집에 계셨다.

누님은 “택권아, 여기 앉아봐. 이렇게 하면 전쟁터에 끌려가지 않을 거야”라며 어디선가 할미꽃 뿌리를 가져왔다. 누님은 내 발등을 돌로 막 긁어 상처를 낸 뒤 그 위에 할미꽃 뿌리 즙을 덧발랐다. 발을 붕대로 감고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그날은 밤새 발등이 욱신거리며 아파 잠을 제대로 못 잤다. 알고 보니 할미꽃 뿌리에 독이 있어 상처가 덧난 것이다. 다음 날 아침 날 누님과 함께 다리를 절뚝거리며 읍사무소로 갔다. 당시 징집 담당자는 그런 날 보며 “이놈, 이거 다리가 이런데 어떻게 해야 하나”라며 고심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누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난 징집을 피할 수 없었다. 오히려 훗날 남한으로 피난을 갈 때 그 상처 부위가 욱신거려 고생만 했다.

막상 징집이 됐지만 우리에겐 총 한 자루도 쥐어지지 않았다. 낮에는 비행기가 하늘을 까맣게 덮어 소위 융단폭격을 가할 때라 쉽사리 이동하지 못했기에 야산에서 숨어 지냈다. 밤이 되면 정처 없이 행군을 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을까.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같이 징집된 친구와 도망치자고 말을 맞췄다.

우리는 인민군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노렸다. 그런데 그만 내가 소변을 보는 사이 그 친구는 혼자 도망쳐 버렸다. 결국 혼자 몰래 산에서 내려왔다. 낡은 초가집이 보이기에 먹을거리라도 얻을 겸 갔더니 노부부가 살고 계셨다. 나이 탓에 미처 피란을 떠나지 못하셨던 것 같았다. 여기가 어디쯤이냐고 물으니 고향에서 불과 걸어서 이틀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그렇게 4개월여 만인 10월 무렵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다시 발각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 집에서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고향에 돌아와서도 낮에는 인근 수수밭에 몸을 숨긴 채 지내다 밤이 되면 집으로 들어왔다. 그러다 유엔군이 곧 북진해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며칠이 지났을까 인민군이 한둘씩 안 보이더니 결국 후퇴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정리=임보혁 기자 bosse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