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살던 동네는 황해도 은율군 서부면 신기리 황씨 집성촌이었다. 동네는 60가정 정도가 주로 세 군데로 나눠 거주했다. 장작불을 때던 그런 시골 동네였다.
우리 부모님은 학교는 근처에도 못 가보셨지만 그저 평생을 땅을 일구시며 땀의 가치를 전하신 농사꾼이셨다. 소작농에 비하면 조금 더 나은, 자기 땅을 가진 자작농이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께서는 처가댁에서 지내셨던 것 같다. 그런 아버지에 대한 인상은 말씀이 많이 없으셨고, 누워계시는 것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부지런하셨던 모습으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나를 마흔한 살의 나이에 늦둥이로 낳으신 어머니는 덕이 많으셨던 분으로 기억한다. 몇 시간씩 걸어서 학교에 가는 나를 위해 도중에 배고프면 먹으라고 찐 감자 두어 개를 싸주시던 기억. 기왓장으로 덮어놓은 화로 위에 뚝배기 된장찌개를 끓여 놓으시고는 하교하는 날 하염없이 기다리시던 기억이 아직도 난다. 그 모습에 난 속이 상해 ‘왜 먼저 식사하시지 않고 기다리시냐’며 괜한 짜증을 부렸던 기억도 있다.
내 위로는 스물한 살 터울의 누님과 열다섯 살 터울의 형님이 계셨다. 두 분 사이에 각각 다른 형제도 있었지만 얼마 못 가 죽었다고 들었다.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기에 당시만 해도 아이가 태어나면 바로 출생신고를 하지 않고 한두 해씩 늦게 했다고 한다.
부모님에 대한 또 다른 기억은 교회에 다니시는 기독교인이셨다는 점이다. 부모님은 신기리의 작은 동네교회 황촌교회에 다니셨다. 면 소재지도 아닌 곳에 교회가 있었다니 지금 생각해봐도 신기할 따름이다.
어린 내가 교회에서 기도하시는 어머니 무릎을 베고 잔 기억이 지금도 어렴풋이 남아있다. 집에는 당시만 해도 귀했던 성경책도 한 권 있었던 기억이 있다. 당시 황촌교회는 마을의 제일 높은 곳, 산등성이 위에 있었다. 그리고 그 교회에서 15m 남짓 아래가 바로 우리 집이었다. 그런 탓에 유년 시절 교회는 내 놀이터였다.
교회에서 봉사하시는 어머니 손을 잡고 찾은 교회를 놀이터 삼아 놀았던 기억이 난다. 또 교회와 가까웠던 우리 집은 매 주일 오전 예배가 끝나고 나면 잔칫집으로 변했다. 예배를 마치고 나면 먼 곳에서 오신, 하얀 옷을 입은 교인분들은 으레 우리 집에 들르셨고 다 같이 점심을 먹곤 했다. 당시 교회에 대한 또 다른 기억은 신발주머니다. 교회에 가려면 꼭 들고 가야 하는 물건이 신발주머니였기 때문이다. 신발을 벗고 마룻바닥으로 된 예배당에 들어가 예배를 드리고 나오면 뒤엉킨 신발들로 내 신발을 잃어버리기 일쑤였다.
그리운 가족에 대한 소식은 나중에 수소문해 형님 가정만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유학차 미국에 머물던 때라 함께 살 기회는 없었다. 월남한 이래 지금까지 부모님의 생사도 확인하지 못하고 뵙지 못한 점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 한쪽이 아려온다. 어렸을 적 그저 밖에 놀러 나갈 생각에 등 좀 긁어달라고 하시던 어머니의 부탁을 잘 못 들어드린 것 같아 지금도 아쉽고 송구한 마음뿐이다.
정리=임보혁 기자 bosse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