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자녀 몰래 가방에 넣은 녹음기로 확보한 담임교사의 막말은 형사재판에서 증거로 쓸 수 없다고 대법원이 판결했다. 타인 간의 대화를 제3자인 부모가 몰래 녹음한 것은 위법하게 수집된 증거라는 취지다. 이번 판결은 웹툰 작가 주호민씨 자녀 사건 등 쟁점이 유사한 다른 아동학대 사건 재판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 1부(주심 오경미 대법관)는 11일 아동학대처벌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초등학교 교사 A씨를 유죄로 판단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동부지법으로 돌려보냈다. A씨는 2018년 3월 자신이 담임을 맡은 3학년 학급으로 전학 온 B군에게 “머리 뚜껑 한번 열어보고 싶어. 뇌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다” 등 정서적 학대 발언을 한 혐의로 기소됐다.
B군은 부모에게 “선생님이 저한테 1, 2학년 제대로 나온 게 맞느냐고 했다”고 말했다. 부모는 이후 등교하는 B군 가방에 몰래 녹음기를 넣어뒀다. 녹음기에는 “바보짓 하는 걸 자랑으로 알아요” 등 막말이 담겼다. B군 부모는 그해 4월 A씨를 아동학대로 신고했다. 녹음한 A씨의 발언도 수사기관에 제출했다.
1심은 혐의를 전부 유죄로 보고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A씨는 2심에서 대화 당사자가 아닌 B군 부모가 대화를 몰래 녹음했고, 위법하게 증거가 수집됐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2심도 녹음 파일을 적법한 증거로 쓸 수 있다고 보고 벌금 500만원을 선고했다. 초3 학생인 B군이 자기 피해를 표현할 능력은 제한적이라 녹음 외에 A씨 범행을 밝힐 방법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대법원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은 “교사가 수업시간 중 교실 내에서 한 발언을 상대방(학생)이 아닌 제3자(학생 부모)가 녹음한 경우 ‘공개되지 않은 타인 간의 대화 녹음’에 해당한다”며 녹음 파일 증거능력을 부정했다.
다만 대법원은 “A씨에 대한 유무죄를 종국적으로 판단한 것은 아니다”고 밝혔다. 파기환송심에서 녹음 파일이 아닌 다른 증거로 유죄가 가능한지 심리가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막말을 직접 들은 당사자인 B군의 증언 등은 증거로 사용될 수 있다.
B군 부모는 아이도 모르게 가방에 녹음기를 넣어뒀는데, 이 점이 ‘불법감청’을 보강하는 근거가 됐다. 대화 당사자인 A씨와 B군 모두 녹음이 이뤄지고 있는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만큼 제3자 불법감청이 맞는다는 것이다. 법원 관계자는 “부모가 미리 사정을 알려 자녀도 대화 당사자로서 스스로 녹음한다는 인식을 갖고 녹음이 이뤄진 경우는 판단이 달라질 여지도 있다”고 말했다. 현행법은 대화 참여자 중 한 명이 상대 말을 녹음하는 것은 불법으로 보지 않는다.
자녀 연령 등에 따라 판단이 달라질 수도 있다. 앞서 생후 10개월 아기에게 돌보미가 욕설을 한 사건에서 법원은 “언어 능력 없는 아이는 말을 하지 않아 ‘타인 간 대화’로 볼 수 없다”며 욕설이 담긴 녹음을 증거로 인정해 유죄 판단했고,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