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삶의 꽃

입력 2024-01-12 04:03

혼자 고립되고 , 고민하고
외로운 순간에
음악의 꽃이 핍니다

열여덟 살의 임윤찬 피아니스트가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하기까지의 기록물, 다큐 필름 ‘크레센도’를 작년 연말에 한 번, 올해 정초에 다시 보고 좋은 기운을 얻었다. 그의 피아노 연주를 카메라가 근접 촬영한 덕에 나는 그의 손가락과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이미 많은 음악평론가가 ‘천재 피아니스트의 마법 같은 연주’를 호평했으므로, 나는 음악에 대해 말을 덧붙이려는 마음은 없다. 다만 그가 영화 제작진과 인터뷰할 때 매우 느린 어조로 더듬더듬 답하던 그 시적인 순간, 어떤 섬광 같은 몇 마디를 한 해를 시작하며 가슴에 품었다.

임윤찬 피아니스트는 말했다. “혼자 고립되고, 고민하고, 외로운 순간에 음악의 꽃이 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음악은 하늘에 있는 예술가에게 전달되기를 바란다는 말을 덧붙였다. 세속의 음악 애호가들이 그의 음악을 향유하고 환호하지만, 그에게는 곡을 쓴 예술가를 해석하고 그 영혼을 잇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무대에서 피운 음악의 꽃은 연습할 때 온전히 외로웠던 순간들의 환영 같은 존재다.

콩쿠르에서 우승하고 난 후 삶이 어떻게 달라졌냐는 질문에는 “계속 연습하고 열심히 노력하며 지내요”라는 담백한 답을 남겼다. 그의 결승 곡 연주 영상은 천만 조회수를 기록하고 ‘임윤찬 현상’도 명백한 사실이지만 그는 ‘연습’에만 관심이 가는 모양이다. 그의 연습 에피소드에는 무시무시한 부분이 있다.

리스트 피아노 연작 중 ‘단테 소나타’를 이해하기 위해 국내에 번역 출간된 단테의 ‘신곡’을 모두 읽었다는 것이다. 반복해서 읽어 거의 외우다시피 한다는 말에서 외로움의 꽃이 어떻게 피어나는지 전율을 느끼게 된다.

천재 음악가가 피운 꽃을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 꽃이 우리 삶을 고양하고 아름답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꽃을 소유할 수는 없다. 음악의 꽃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 살아 있는 존재로서 나는 어떤 꽃을 피울 수 있을까.

중세 신학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일찍이 단순한 이야기로 우리가 사는 이유를 밝힌 적이 있다. “한 착한 사람에게 ‘당신은 어째서 신을 사랑합니까’라고 묻는다면, 이런 대답을 듣게 될 것이다. ‘모르겠는데요. 그가 신이기 때문이죠’라는” “왜 진실을 사랑합니까?” “진실을 위해서!” “왜 정의를 사랑합니까?” “정의를 위해서!” “그러면 왜 삽니까?” “맹세코, 모르겠는데요. 살고 싶으니까!”

살기를 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삶의 존재 이유다. 나는 이 이야기를 20세기 사상가 에리히 프롬의 ‘존재의 기술’에서 읽었다. 삶을 소유 형식과 존재 형식으로 나누어 분석함으로써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하는 사람들의 필독서가 된 ‘소유냐 존재냐’의 속편에 해당하는 책이다.

그는 한 사람의 삶의 방식이 소유 쪽을 지향하면 가졌거나 가지지 못한 것에 마음이 쏠리지만, 존재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면 무슨 행위를 했는가에 집중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의미 있는 존재의 행위는 자신 밖으로 나아가 다른 사람들에게로, 자연, 사상, 예술, 사회의 세계로 관심을 끌게 한다. 관심(interest)이란 단어는 라틴어 ‘inter-esse’에서 유래했는데, 자기 안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사이에 있다’ ‘저 너머에 있다’는 뜻을 내포한다.

에리히 프롬은 이 관심의 발전을 수영장에 뛰어든 사람을 예시로 설명했다. 수영장을 바라보는 사람이 묘사하는 것은 수영장에 뛰어들어 젖은 상태가 된 사람과 같을 수 없다. 관심의 발전은 외부인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뛰어드는 용기를 내는 데 있다는 것이다.

내가 무언가에 관심을 갖고 발전시켜 뛰어든 행위가 꽃으로 피어난다. 살아 있는 존재는 무슨 꽃이든 피울 수 있다. 살고 싶은 마음이 피우는 꽃이다. 임윤찬 피아니스트의 간절한 말에 빚졌다. 피우고 싶은 꽃을 위해 외로운 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자기’라는 관념에 갇히지 않고 자유로워질 순간을 꿈꾸며 새해를 열었다.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