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에서 여성을 추행한 A씨는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형이던 1심을 지난해 1월 항소심에서 벌금 500만원으로 감형받았다. 재판부는 A씨가 피해자에게 1000만원을 공탁한 점을 유리한 양형 사유로 봤다. 공탁은 항소심 선고 6일 전 기습적으로 이뤄졌다. 검찰도 선고 후에야 공탁 사실을 통지받았다. 검찰은 피해자 의사 확인 등 추가 심리 없이 감형한 것은 위법이라고 상고했지만 대법원이 받아들이지 않아 벌금형이 확정됐다.
피해자 동의 없는 이른바 ‘기습공탁’을 통한 감형 시도가 잇따르자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대검찰청은 7일 공탁을 양형에 적용할 때 피해자 의사를 고려하도록 대법원 양형위원회에 의견을 개진하는 등 적극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피해자 인적사항 없이 공탁이 가능하도록 한 형사공탁 특례제도는 실질적 피해 회복을 도모한다는 취지로 2022년 12월 도입됐다. 하지만 합의에 실패한 피고인이 감형을 노리고 선고 직전 공탁하는 등 악용 사례가 잇따랐다. 서울중앙지검 소속 손정아·박가희·임동민 검사는 최근 논문에서 “피해자의 용서를 돈으로 살 수 있게 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지적했다.
대검은 지난해 8월 기습공탁 시 선고 연기나 변론 재개를 신청하고 피해자 의사를 신속히 확인해 법원에 제출하는 등의 대응방안을 일선 검찰청에 지시했다. 인천지검은 지난해 11월 만취 상태로 음주단속을 피해 도주하다 보행자를 치어 숨지게 한 피고인이 변론 종결 후 3000만원을 공탁하자 유족 측 거부 의사를 확인하고 변론 재개를 신청했다. 재판부는 변론을 재개하지 않았지만 공탁을 유리한 양형 요소로 반영하지 않았다고 판결문에 명시하면서 징역 10년 중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마다 판단이 다른 점도 문제로 꼽힌다. 공탁 사실만 있어도 유리한 양형 요소로 보는 재판부가 있는 반면 처벌 의사가 확인되면 양형에 반영하지 않는 재판부도 있다. 2022년 12월 서울 강남구 어린이보호구역에서 초등학생을 치어 숨지게 한 B씨는 1·2심에서 총 5억원을 공탁했지만 2심은 유족의 거부 의사를 반영해 “양형에 매우 제한적으로 고려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피해자가 공탁금을 거절하면 양형에 고려하지 않도록 제도 개선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형사공탁 시 법원이 피해자 측에 곧바로 공지하게 하는 내용의 공탁법 일부개정안도 국회에 계류 중이다.
대법원 양형위는 “공탁이 너무 쉽게 유리한 양형 사유로 적용된다는 비판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양한주 기자 1wee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