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에서 중학생 자매를 키우는 김모씨는 지난 11월 7일 직장에서 딸아이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중학교 1학년인 막냇동생이 교실에서 성추행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 언니는 동생이 불안한 상태이니 빨리 와 달라며 울먹였다. 막내는 혼자 책을 읽거나 만들기를 좋아하는 조용한 아이였다. 김씨는 학교에서 어떤 일을 당해 왔는지 힘겹게 입을 떼는 막내의 말 하나하나가 ‘비수’ 같았다고 했다.
막내인 A양은 수업이 끝난 교실에서 혼자 학교 전시회에 출품할 작품을 만들고 있었다. 소리가 나 고개를 들어보니 다른 반 B군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B군은 평소 자신을 따라다니던 아이였다. 이날도 ‘도와준다’며 다가오면서 손을 뻗자 뿌리치고 교무실로 피했다. A양은 무섭고 수치스러워 교사들에게 말하지 못했다. 10분 정도 지나 B군이 없을 줄 알고 가방을 챙기려 교실로 들어갔지만 B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B군은 A양의 입을 막고 팔을 제압한 뒤 신체를 접촉했고, 놀란 A양이 울음을 터뜨리자 ‘미안하다’며 교실 밖으로 도망갔다. A양은 더 무서운 일이 있을까봐 나가기 무서웠고, 목숨의 위협을 느꼈을 뿐만 아니라 부끄럽고 수치스러워 학교에 있기 싫었다고 했다. A양은 이 같은 내용을 학교 조사 과정에서 진술했다.
김씨는 사건을 알아갈수록 기막힌 사실과 마주해야 했다. B군 말고 딸을 괴롭힌 학생이 3명 더 있었다. 같은 반 학생이었는데 쓰레기를 던지고 폭언하는 등 집요하게 못살게 굴었다. A양은 급식시간이 두려워 밥을 거르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김씨는 평소 괴롭히던 3명이 발달장애 학생인 B군을 부추겨 성추행한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세 학생이 딸에게 음담패설을 하던 시기와 B군의 성추행이 시작된 시기가 같다는 이유였다. 김씨는 딸이 학교를 다니려면 네 명의 학생과 반드시 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학교와 교육 당국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확신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학교가 김씨에게 통보한 기간은 7일이었다. 학교는 가해학생들과 A양을 학교에서 떨어뜨려놓을 수 있는 ‘최대치’라고 했다. 학교폭력 심의를 하는 교육지원청의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심의위)는 최소 두 달 뒤에나 열릴 수 있다고 했다. 심의위에서 피해를 인정받아야 가해학생 전학 등 조치가 이뤄진다. 즉 A양이 등교한 뒤 최소 7주 동안은 가해학생과 함께 지내야 한다는 의미였다.
김씨는 전학 가라는 통보로 받아들였다. 학교는 학생들이 서로 마주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했으나 성폭력 피해자 입장에선 턱도 없는 소리였다. 결국 조부모가 사는 지역으로 딸을 보내기로 했다. 자영업자인 김씨는 경제적 기반이 인천이라 함께 가진 못했다. 하지만 딸들이 걱정돼 결국 인천을 뜰 준비를 하고 있다. 김씨는 “딸은 아직도 잠을 잘 못잔다. 우리 가족의 일상이 파괴됐다. 하지만 가해자는 아직 학교를 잘 다닌다”며 “학교는 해줄 게 없고 골치 아파하는 모습이 역력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사건이 발생한 인천 S중학교와 이 학교를 담당하는 교육지원청, 인천교육청은 ‘어쩔 수 없었다’고 입을 모았다. 우선 B군이 성추행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B군은 A양이 교실에서 우는 것 같아 도움을 주려고 다가갔을 뿐이고 A양이 교무실에서 돌아와 자신을 놀려 입을 막았으며 몸싸움 중 허벅지를 만졌다고 했다. 다른 3명의 아이들도 가해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학교가 ‘즉시분리’ 제도로 학생들을 분리할 수 있는 기간은 7일이다. 심의위가 열리기 전 두 달 가까운 기간 가해학생들을 등교하지 못하도록 ‘긴급조치’(피해자 보호를 위해 심의위 개최 전 학교가 취할 수 있는 조치)를 내리려면 학교 나름의 ‘확신’이 필요했다. 하지만 교사들은 교육 전문가이지 수사관이 아니다. 언제 열릴지 모를 심의위를 기다리며 피해학생 진술만으로 관련 학생 전부를 학교에 못 오도록 하기 어려웠다. 등교 중지 뒤 가해학생의 학습 결손을 줄이는 조치도 학교의 의무 사항이다. A양이 충격으로 등교하지 못해 자연스럽게 분리 조치가 이뤄졌기 때문에 가해학생들의 등교 역시 막을 이유가 없었다는 게 지원청의 설명이다.
심의위 지연은 인천만의 현상은 아니다. 교육부 지침은 ‘3주 이내 처리하되 부득이하면 1주 연장 가능’이다. 교육부에 따르면 2022년 전국에서 심의위가 1만5643건 열렸는데 5403건(34.5%)은 4주 이상 소요됐다. 서울은 1923건 중 1285건(66.8%), 인천은 1307건 중 799건(61%)이 규정을 지키지 못했다(표참조).
당국 판단은 엇갈렸다. 교육부는 “학교가 긴급조치를 통해 A양을 보호하고 지원청은 직권으로 심의위를 당길 수 있었다”고 했다. 또 “앞으로 학폭 전담조사관 제도가 도입되는데 조사 전문성이 강화되면 심의위 지연 문제도 완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지원청 관계자는 “피해자 중 절박하지 않은 이는 없다. 지원청이 경중을 가려 심의위 개최 순서를 바꾸기 어려워 (교육부 지적은) 현실성이 없다”며 “2020년 심의위 업무가 학교에서 지원청으로 넘어오면서 업무가 폭증한 게 (심의위 지연) 근본 원인”이라고 맞받았다.
윤석진 해맑음센터(학폭 피해자 전문기관) 상담팀장은 “(A양 사건은) 피해자가 결국 학교를 떠나는 전형적인 사례로 보인다. 피해학생 대다수는 친구와 선생님이 있던 학교를 떠나기 싫어하지만 가해학생과 같은 공간에 두면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한다”며 “사태가 장기화할수록 지치는 쪽은 피해자여서 학교를 떠나게 된다. 학폭 제도가 피해자 중심으로 운영되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이도경 교육전문기자 yid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