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에 32명의 사상자를 낸 서울 도봉구 아파트 화재가 사람의 부주의로 발생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화재 당시 방화문은 개방돼 있었고 화재 대피에 쓰이는 완강기도 설치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불길과 연기 등 상황에 따라 대피로를 확보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경찰은 26일 소방 당국, 한국전기안전공사 관계자 등 총 21명의 인력을 투입해 합동감식을 진행했다. 서울경찰청 과학수사대 관계자는 합동감식 결과 브리핑에서 “현장에서 인적 요인에 의한 발화를 뒷받침하는 결정적 증거물이 나왔다”며 “부주의에 의한 발화로 볼 수 있다”고 밝혔다.
경찰은 아파트 3층 집의 거실에 인접한 작은 방에서 불씨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했다. 이곳에서 수북이 쌓인 담배꽁초와 라이터를 발견했다. 경찰은 담배꽁초가 화재의 직접적 원인인지는 조사해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면서도 전기 기구의 오작동 등 전기적 요인, 방화로 인한 발화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봤다.
현장감식 결과 아파트 층마다 방화문은 설치됐으나 대부분 열려 있어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문이 닫혀 있지 않아 불길과 연기를 차단하지 못하고, 계단 통로를 따라 불길과 연기가 빠르게 위로 확산했다.
화재 대피용 완강기도 없었다. 3층 이상 10층 이하 건물에만 설치하도록 했던 완강기는 2015년 의정부 화재 사고 이후 10층 이상 건물에도 설치하도록 법이 개정됐다. 하지만 이 아파트는 2001년 완공돼 완강기가 설치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번 사고 사망자 중 박모(33)씨는 7개월 딸을 안고 4층에서 뛰어내리면서 딸을 구하고 숨졌다.
화재 사고 때마다 방화문 개폐, 스프링클러와 완강기 설치 여부 등 소방시설 관리·설치 문제가 반복해서 지적되고 있다. 노후 아파트에는 현재 설치 의무인 시설이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국가통계포털 건축연도별 주택 현황에 따르면 2000년 이전에 지어진 아파트는 100만 가구가 넘는다.
소방시설 관련 법이 개정돼도 노후 아파트에 소급 적용할 수 없다는 것도 문제다. 인세진 전 우송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예전부터 소방설비 의무설치 규정을 소급 적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면서도 “하지만 비용 등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혀 논의가 쳇바퀴 돌고 있다”고 지적했다.
화재 대피 요령을 국민이 숙지할 수 있도록 정부가 홍보·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소방청은 불길과 연기의 확산 상태를 보고 대피로를 찾을 것을 권했다. 집 안으로 불길이나 연기가 들어오면 지상층이나 옥상 등으로 대피해야 한다. 3층 이상에서 창밖으로 뛰어내리는 것은 자칫 머리부터 떨어져 추락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만일 현관에서 불이 나 나갈 수 없거나 복도에 연기가 가득하다면 집 안에 대피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아야 한다. 화장실 문을 닫고 젖은 수건 등으로 틈을 막은 뒤 환풍기를 틀고, 물을 뿌리며 구조를 기다리는 것도 방법이다.
이가현 나경연 김재환 백재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