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울의 봄’을 만든 김성수 감독(62)은 1979년 12월 12일 육군참모총장이 납치될 때 서울 한남동 집에서 총소리를 들었다. 후에 “이렇게 쉽게 우리나라 군부가 무너졌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고, 이는 영화의 시작이 됐다. 첫 대본은 실명으로 돼 있었다. 각색을 많이 한 인물일수록 이름이 많이 바뀌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노태우 제9보병사단장은 각각 전두광과 노태건으로 한 글자씩만 바꿨지만, 이태신 수도경비사령관은 실존 인물인 장태완과 한 글자만 일치한다. 배우 정우성이 연기한 이태신 사령관이 행주대교를 혼자 막아서는 장면과 경복궁 대치 장면은 허구다. 쿠데타 이후 장 사령관의 실제 삶은 비극이었다. 부친은 곡기를 끊고 세상을 떠났고, 외아들은 1982년 서울대 자연대 수석 입학 후 한 달 만에 변사체로 발견됐다.
반면 12·12 쿠데타 과정에서 무능하거나 우유부단해서 도움을 준 이들은 잘 먹고 잘 살았다. 노재현 국방부 장관을 보자. 군사 반란 시작과 함께 달아났다가 이후 장 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가만히 있어. 시키는 대로 해”라고 지시해 반란군의 승리를 터준 인물이다. 그는 한국비료공업협회 회장 등을 거치며 부귀영화를 누린 후 93세로 사망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윤성민 육군참모차장은 또 어떤가. 지휘계통에 따라 진압 책임을 지게 됐지만 우유부단한 처신으로 반란군에 도움을 준 것으로 평가받는다. 국방부 장관 등을 거쳐 92세에 사망한 후 현충원에 안장됐다. 육군 통신 감청을 맡았던 문일평 대령의 실제 모델은 허화평 대령이다. 전두환의 최측근으로 승승장구해 14대 15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이들로 인해 한국 현대사의 봄은 얼마나 지연됐던가.
24일 서울의 봄이 1000만명 관객을 넘겼다. 그 울림이 크다. 영화는 그동안 주목받지 않았던 인물들까지 역사의 심판대에 올렸다. 한 사람의 잘못된 리더가 얼마나 역사를 후퇴시킬 수 있는지, 한 명의 정의로운 리더가 얼마나 필요한지 새삼 되새기게 되는 2023년 겨울이다.
한승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