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백설기의 맛

입력 2023-12-22 04:07

신혼 시절, 신축 빌라 5층으로 이사했을 때의 일이다. 이삿짐을 정리하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어안렌즈로 보니 아래층 아주머니였다. 허리에 손을 얹고 뭔가 단단히 따지러 온 태세였다. 문을 열자 아주머니는 지병을 앓고 있으니 조용히 해달라면서 이 집의 전 주인과도 소음 문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아주머니가 가고 나서 나는 청소기를 돌리려다 말고 걸레로 방을 닦았다.

전세 2년 동안 살 집인데, 이웃과 얼굴 붉히고 싶지 않았다. 방법을 궁리하다가 강경책보다 회유책을 쓰기로 했다. 아주머니의 억양과 사투리로 짐작해 보건대 고향이 전라도 쪽인 것 같았다. 때마침 시댁에서 보낸 여수산 갓김치가 있어서 수북하게 그릇에 담았다. 그러고는 인사가 늦었다면서 아래층 아주머니께 건넸다. 아주머니는 정말 ‘갓김치’를 좋아한다면서 반색했다. 나를 경계하던 눈빛도 조금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한숨 돌리고 집으로 돌아와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그때 느닷없이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갑자기 긴장되었다. ‘또 아래층인가?’ 헛기침을 한번 하고 어안렌즈로 밖을 보았다. 웬 아주머니가 서 있었다. 그가 문에 대고 “1층에서 왔어요”라고 말했다. 문을 열자 아주머니가 뭔가를 내밀었다. 두부 한 모만 한 백설기였다. 아주머니는 손녀 백일이라 떡을 돌리는 중이라고 하셨다.

뜻밖의 선물을 받아서일까. 나는 거듭 아주머니께 감사 인사를 했다. 그리고 태어난 지 겨우 백일이 된 아기를 그려보았다. 이마에 순하고 가늘게 내려앉은 머리카락 몇 올, 조그만 포도알 같은 발가락, 송편보다도 작게 꼭 쥔 주먹을. 쫄깃한 백설기를 떼어 먹으며 창밖을 보았다. 언젠가 아기도 자라면 이 골목을 누비겠지. 응달진 골목길에 녹지 않은 눈이 희끗희끗했다.

신미나 시인 겸 웹툰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