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의 반도체 장비업체 ASML은 업계의 슈퍼을(乙)로 불린다. 한국의 삼성전자와 대만의 TSMC, 미국의 인텔 등 세계 유수의 반도체 기업들이 나노미터급 최첨단 반도체를 생산하려면 ASML이 제작하는 극자외선 노광장비가 있어야 한다. ASML의 시장 점유율은 90%가 넘는다. 대당 가격이 3000억원대에 달하지만 부르는 게 값이다. 납품받으려면 1년 이상 대기해야 한다.
ASML의 극자외선 노광장비를 들여다 보면 그 자체가 글로벌 공급망의 집약체다. ASML이 직접 만드는 부품은 15%에 불과하다. 네덜란드산 비중은 3분의 1을 넘지 않는다. 핵심 부품은 미국과 독일에서 조달한다. 극자외선을 만드는 원천기술은 미국 기업 사이머가 개발했다. 사이머 방식에 따르면 진공상태에서 시속 320㎞ 이상의 속도로 떨어지는 직경 0.003㎜ 크기의 주석 방울을 레이저로 두번 쏴 폭발시키면 주석 방울은 태양 표면보다 더 뜨거운 섭씨 50만도의 플라스마 상태로 변한다. 이런 과정을 초당 5만 회 반복하면 반도체 제작에 필요한 양의 극자외선이 생긴다. 레이저 장비는 독일 기업 트럼프(Trumpf)가 개발했다. 생성된 극자외선이 실리콘 웨이퍼에 전달될 때까지 주변 물질에 흡수되지 않도록 하려면 반사율이 매우 높은 거울이 필요한데 또다른 독일 기업 자이스가 이 문제를 해결했다.
ASML이 지금 수준의 극자외선 노광장비 기술을 보유하기까지는 30년이 걸렸다. 경영진은 현존 최고 기술을 찾기 위해 전 세계를 누볐고 자국 기술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극자외선 노광장비 개발을 선언하고도 첫 제품이 나오기까지 20년이 소요됐다.
ASML의 성공 뒤에는 네덜란드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 네덜란드 정부는 2018년 반도체장비산업 혁신 어젠다 3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자국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산학연계를 강화하고 국제협력을 중시했다. ASML 성공 사례는 한국에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전석운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