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휴일 근무 거부한 워킹맘… 대법원 “회사가 양육 지원해야”

입력 2023-12-11 04:09

어린 자녀를 키우는 ‘워킹맘’에게 회사가 새벽·공휴일 근무를 강요하고, 이를 거부하자 채용 불가를 통보한 것은 부당하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사업주에게 소속 근로자의 일·가정 양립을 지원할 의무가 있다는 점을 명시적으로 인정한 첫 대법원 판결이다. 육아 중인 근로자와 사측의 근로조건 협의에 이번 판결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대법원 2부(주심 민유숙 대법관)는 도로 관리용역업체 A사가 “부당해고 구제 판정을 취소해 달라”며 낸 소송 상고심에서 A사 손을 들어준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고 10일 밝혔다.

2008년부터 고속도로 영업소에서 근무한 워킹맘 B씨는 2017년 1세, 6세 자녀를 키우고 있었다. 용역업체는 그간 B씨의 출산과 양육 상황을 배려해 매달 3~5차례 정도 B씨의 오전 6시~오후 3시 초번 근무를 면제해줬다. B씨는 보육시설이 운영되지 않는 공휴일에는 연차 휴가를 사용해 아이를 돌봤다.

그런데 2017년 4월 고용 승계 조건으로 새 용역업체 A사가 들어오면서 사정이 바뀌었다. A사는 기존 직원들과 수습기간 3개월을 둔 새 근로계약을 체결했고 B씨에게 초번 및 공휴일 근무를 지시했다. B씨는 “오랜 근무 형태를 하루아침에 변경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B씨는 회사 방침에 불복해 초번·공휴일 근무를 하지 않았다. A사는 초번 근무 시 허용됐던 외출을 금지하기도 했다. A사는 3개월 후 무단결근 등 근태를 문제 삼아 채용 거부 의사를 통보했다.

B씨는 “채용 거부 통보는 부당해고와 다를 바 없다”며 부당해고 구제 신청을 냈고, 중앙노동위원회는 “부당해고가 맞는다”고 판정했다. A사는 불복해 소송전을 벌였고 1심은 B씨 손을, 2심은 A사 손을 들어줬다.

대법원은 채용거부 통보가 부당하다며 다시 B씨 손을 들어줬다. 대법원은 “B씨가 육아기 근로자라는 사정만으로 초번·공휴일 근무 자체를 거부할 수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면서도 “A사가 육아기 근로자의 일·가정 양립을 위한 배려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볼 여지가 상당해 채용 거부 통보의 합리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남녀고용평등법은 사업주가 육아기 근로자의 육아를 지원하기 위해 근로시간 조정 등 조치를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대법원은 “A사는 B씨가 자녀를 보육시설에 등원시켜야 하며, 초번 근무시간에 일할 경우 양육이 어려울 것이라는 사정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이어 “수년간 지속해 온 근무 형태를 갑작스럽게 바꿔 공휴일에 매번 출근하라고 요구하는 건 양육에 큰 저해가 되지만, 경영상 필요성이 큰 지시로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기업이 육아기 근로자 자녀의 양육을 지원할 책무를 부담한다는 점을 분명히 확인한 판결”이라며 “일·가정 양립 가치가 존중되는 방향으로 노사관계가 형성되는 데 이번 판결이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