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때까지 온전하게 걸을 수 없다니….’ 너무 기가 막히고 머릿속이 하얘졌다. 몇 날 며칠을 다리를 끌어안고 울었다. ‘그냥 이대로 죽을까. 이렇게 살아서 뭐하겠어.’ 목발을 짚고 집 밖으로 나왔다. 이전과 다른 내 모습을 대하는 바깥세상의 시선은 차가웠다. 얼마 전까지는 호흡하듯 탔던 버스가 나를 밀쳐내듯 떠났다. 하는 수 없이 택시를 타려는데 성질을 내는 택시 기사의 말에 숨이 턱 막혔다. “절름발이잖아! 재수 없게.”
지나가는 사람마다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고는 수군거렸다. “저 사람 봐. 못 걷는 사람인가 봐.” “절름발이다. 돌아서 가자.” 식당을 가도 온통 날 괄시하는 사람들뿐이었다. 식당 주인들은 내가 밥을 다 먹고 나가면 내 뒤통수를 향해 “하루 종일 부정 탈까 겁나네”라고 막말을 쏟아붓고는 소금을 뿌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밤무대 최고 인기가수였는데 하루아침에 세상 모두가 등을 돌리는 사람으로 전락했다. 평생 목발을 짚고는 도저히 세상을 제대로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겠다 싶어 자취방에서 수면제를 입에 털어 넣었다. 그렇게 잠이 든 날 아침, 주인은 내 방문 앞을 지나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문 앞에 분명 신발이 있는데 늦은 아침까지 인기척이 없는 것을 이상히 여겼던 것이다. 몇 번 나를 불렀는데 대답이 없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방문을 열어 봤다고 한다.
그렇게 세 번 자살 시도를 했는데 그때마다 신기하게 자취방 주인은 내가 쓰러져 있던 걸 알아내 스러져가던 목숨을 살려냈다. 그래서였을까. ‘그래도 한번 살아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지인들의 도움을 얻어 취직했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매번 일을 시작하고 며칠이 못 되어 쫓겨나기 일쑤였다. 고용주는 내가 실수하면 설명해 주거나 가르쳐 주기보다는 그날로 바로 해고했다.
그 흔한 공사판 일용직도 할 수 없었다.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던 때라 제대로 걷지 못하는 사람을 쓸 고용주는 없었다. 이런 생활이 지속되자 자연스레 먹고사는 게 힘들어졌다. 어느 날엔 분명 거리에서 눈을 마주친 친구가 나를 피하는 모습을 보고야 말았다. 주변 지인들이 점점 나를 피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배는 곯아도 그건 참기 어려웠다.
결국 나는 네 번째 자살 기도를 위해 수면제를 모으고 보다 치밀하게 계획도 세웠다. 매번 자취방 주인에게 발견돼 실패했으니 이번엔 먼 곳으로 가기로 했다. 강릉행 고속버스표를 끊고 멍하니 주저앉아 버스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열두 남매가 부모님 사랑을 받으며 한집에서 함께 행복하게 살던 때가 있었다. 학교에선 반장에 전교 회장도 했고 교회에선 전도상도 받았으며 신인가수 선발대회 1등에 화려한 조명 아래 밤무대 인기가수 시절도 보냈던 나였다. 그 기억이 가족에 다다른 순간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눈물이 쏟아지며 꺼이꺼이 울었다. 버스터미널의 모든 시선이 주저앉아 엉엉 우는 청년에게 쏠렸다.
“용대야.” 정신없이 울다 그 목소리에 번쩍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들어 보니 익숙한 얼굴이었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