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적”… 하버드 나온 외교관, 알고보니 40년 쿠바 간첩

입력 2023-12-06 00:03
빅터 마누엘 로차 전 주볼리비아 미국 대사가 간첩 혐의로 기소된 뒤 4일(현지시간) 미 법무부가 공개한 사진. 로차가 쿠바 정보기관 연락책으로 위장한 미 연방수사국(FBI) 요원에게 자신의 스파이 활동을 “그랜드슬램 이상”이라고 자랑하는 장면이다. AP연합뉴스

미국의 전직 고위 외교관이 40여년간 쿠바 정부 비밀요원으로 스파이 활동을 한 혐의로 붙잡혀 기소됐다. 그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미주담당 국장, 볼리비아 대사 등을 지내며 쿠바를 위한 간첩 활동을 해 왔던 것으로 조사됐다.

미 법무부는 4일(현지시간) 빅터 마누엘 로차 전 주볼리비아 미국 대사를 간첩 혐의 등으로 연방검찰이 기소했다고 밝혔다. 콜롬비아 출신인 로차 전 대사는 1978년 미국으로 귀화했다. 그는 예일대와 하버드대, 조지타운대에서 인문학을 전공한 뒤 1981년 국무부에 들어갔다. 검찰은 그가 이때부터 최근까지 40년 넘게 쿠바 정보기관의 비밀요원으로 활동하며 미국의 정보를 넘겼다고 설명했다. 국무부에서 일하는 동안 미 정부 내에 거짓이나 오해의 소지가 있는 정보도 퍼뜨렸다고 한다.

로차가 쿠바 정보기관에 포섭된 경위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미국 외교관으로서 도미니카공화국과 온두라스, 멕시코, 아르헨티나에서도 근무했다. 국무부 퇴직 후 2006~2012년에는 쿠바를 관할하는 미군 남부사령관의 고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석탄 수출업체 엑스콜, 로펌 폴리앤라드너 등에서 고위직을 맡았다.

메릭 갈런드 미 법무장관은 “로차는 40년 이상 쿠바 정부의 요원으로 일하면서 미 정부 내에서 비공개 정보에 대한 접근 권한과 미국 외교정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직책을 획득해 왔다”며 “외국 요원이 미국 정부에 가장 광범위하고 오랫동안 침투한 사건 중 하나”라고 말했다.

로차의 스파이 활동은 미 연방수사국(FBI) 언더커버(위장근무) 요원의 수사로 덜미가 잡혔다. 로차에 관한 첩보를 확보한 FBI 요원이 쿠바 정보기관의 새로운 연락책으로 가장해 그에게 접근했다. 로차는 언더커버 요원과 대화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40여년에 걸쳐 쿠바를 위해 일했다고 여러 차례 진술했다고 한다.

로차는 언더커버 요원과 대화할 때 미국을 ‘적’이라고 일관되게 언급했고 쿠바 정보기관 담당자들을 동지라고 불렀다. 또 경계심이 풀어졌을 때는 자신의 스파이 활동을 “그랜드슬램 이상”이라고 표현하며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크리스토퍼 레이 FBI 국장은 “미국 외교관이 적대적인 외국 세력인 쿠바의 대리인으로 활동하는 것은 국민 신뢰를 배신하는 행위”라며 “앞으로도 미국에 대한 맹세를 위반하는 자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던 끝까지 찾아내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말했다.

워싱턴=전웅빈 특파원 im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