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들은 모두 잔뜩 화가 나 있는 것 같습니다. 마치 분노 조절 장애에 걸린 것 같습니다. 오래 못 참고 금방 폭발해 버립니다. 신호등이 바뀌었는데도 앞차가 빨리 출발하지 않으면 어김없이 경적을 세차게 울립니다. 층간 소음을 못 참고 남에게 해를 가합니다. 교회에서조차도 성도들끼리 서로 참지 못하여 큰 갈등과 분열이 가득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오래 참음’의 미학을 누려야 합니다. 왜 신자들은 오래 참아야 할까요.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죄인인 우리를 향해 오래 참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오래 참으심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시 103:8) 자비와 긍휼과 은혜와 인자가 풍부하신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입니다. 화를 오래 참으시는 분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오래 참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벧후 3:15) 그리스도의 오래 참음은 곧 우리에게 구원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오래 참지 않으셨다면 우리에게 구원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생은 오래 참음으로 점철된 인생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중 비하’를 자처하셨습니다. 성육신 고난 십자가 무덤이란 지극히 낮아짐을 경험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모든 비하의 근저에는 그리스도의 ‘오래 참으심’이 서려 있습니다.
성육신 사건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인간이 되신 존재론적 비하 사건입니다. 무소 부재하고 편재하신 참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는 것은 사실 하나님으로서는 참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께서는 오래 참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율법 아래 거하는 고난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받으신 고난은 십자가를 짊어지시는 고난이었습니다. 거룩한 참 하나님이라면 도무지 당해서는 안 될 고난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자기에게 채찍질하는 사람과 자기 손발에 커다란 못을 박는 로마 병정의 손을 능히 부러뜨릴 수 있는 전능한 분이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당장 내려오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께서는 오래 참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이라면 도무지 해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야말로 죽음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야말로 죽음의 영역에 계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조차도 오래 참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의 권세인 무덤에 들어가서는 안 될 분이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생명’과 ‘빛’이십니다(요 1:4). 죽음과 어둠의 공간 안에 거할 분이 아니십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의 권세 안에서 오래 참으셨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고전 13:4) 그리스도의 오래 참으심은 우리에게 ‘구원’이 됐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우리도 오래 참는 일입니다. 사랑으로 오래 참읍시다. 오래 참으며 사랑합시다. 이 가운데 각종 상황 속에서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구원이야말로 오래 참음의 미학이 주는 참된 복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곱씹습니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벧후 3:15)
박재은 총신대 교수
◇박재은 교수는 총신대 신학과에서 지·정·의의 균형을 이루는 젊은 기독 지성인을 길러내고 있습니다. 교목실장으로 대학 채플을 담당하고, 신학과장으로 개혁파 조직신학의 뼈대를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