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 수가 적은 희귀질환은 일반 질병보다 상대적으로 치료받기 힘든 게 현실이다. 기적같이 치료제가 개발돼 국내 도입되더라도 환자들은 비싼 약값 때문에 또다시 벽에 부딪힌다. 이에 정부가 중증·희귀질환 치료제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건강보험 급여화 심사 과정에 '경제성 평가자료 제출 생략 제도(경평 면제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환자가 신약을 보다 빨리 쓸 수 있도록 비용 효과성 평가를 면제해 주는 것이다.
이 제도의 대상이 되려면 임상적 필요도, 근거 기준, 해외국가의 급여 여부 및 조정 약가, 대상 환자 수 등 수많은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임상적 필요도가 가장 큰 걸림돌로 꼽힌다. 기존에는 대체 가능한 치료법이 없거나 ‘치료적 위치’가 동등한 약이 없으면서 생존을 위협할 정도의 심각한 질환에 사용되는 약제만 경평 면제 대상이 될 수 있었다.
까다로운 조건에 대한 지적이 제기되자 보건복지부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올해 1월부터 경평 면제 대상에 ‘소아에 쓰이는 약제로 치료적 위치가 동등한 제품 또는 치료법이 없고 임상적으로 의미 있는 삶의 질 개선을 입증하거나 관련 위원회에서 인정하는 경우’를 추가했다. 환자의 접근성 강화를 위해 기준을 완화한 것이다.
그런데 당초 의도와 달리, 해당 개정안이 되레 환자들의 신약 접근성을 축소하는 모순적인 결과를 낳고 있다. 19세 미만 소아·청소년만을 대상으로 하면서 성인 환자가 자연스럽게 배제돼 또 다른 사각지대가 생겨난 것이다.
되레 신약 접근성 축소 ‘모순’
실제 이번 정책으로 건보 적용을 받게 된 첫 약제 사례를 보면 소아·청소년 환자에게만 급여 혜택이 주어지고 성인 환자는 계속 비급여 상황에 놓여 고통받고 있다. 지난 5월부터 보험이 적용된 ‘저인산혈증성 구루병’ 치료제(부로수맙)가 해당한다.
2020년 국내 허가를 받은 이 신약은 여러 번의 급여 신청에도 번번이 고배를 마시다 올해 경평 면제 대상 확대로 18세 미만 환자에게 급여가 적용됐다. 이 약의 값은 연간 2억원이나 드는데, 건보가 적용되면 희귀질환 산정 특례로 본인 부담이 10%(본인부담상한제 적용 시 최소 134만, 최대 1014만원)로 확 준다. 그간 자녀들의 고통을 바라봐야 했던 부모들 입장에선 환영할 일이다. 문제는 급여 대상에서 빠진 성인 환자들이다. 저인산혈증성 구루병의 국내 환자 수는 150여명으로 추산되는데, 이 중 소아·청소년은 100명 정도다.
환자들은 “치료 혜택이 소아, 청소년에 한정되면서 남은 3분의 1에 해당하는 성인들은 여전히 치료제가 있어도 쓸 수 없는 그늘 속에 남게 됐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중증·희귀질환자의 신속한 치료 접근성을 보장한다는 제도의 취지가 무색해진 셈이다.
이 같은 모순된 경평 면제 제도에 대한 지적은 지난해 개정안이 처음 논의될 때부터 제기됐다. 국정감사에서도 거론됐고,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 9월 이종성 국민의힘 의원실이 국회에서 개최한 정책토론회에선 또 다른 희귀질환인 ‘유전성 혈관부종’ 환자들이 겪는 고충이 부각됐다.
이 질환은 기도 등 호흡기에 갑작스러운 부종이 발생하고 질식으로 인해 생명을 위협받을 수 있다. 완벽하게 질환을 조절하고 삶의 질을 정상화하기 위해선 지속적인 투여로 증상 발생을 미리 막는 ‘장기 예방 치료제(라나델루맙)’ 사용이 국제 지침으로 권고된다.
국내 유전성 혈관부종 진단 환자는 152명(2022년 기준)인데, 소아·청소년은 극소수이고 대부분 성인이다. 제약사는 2021년 해당 신약의 허가를 받고도 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이 극히 적다는 이유로 급여 신청을 차일피일 미뤄왔다. 비급여인 경우 해당 약값은 연간 2억5000만원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일본 캐나다 영국 독일 등에선 이미 보험이 적용되고 있으며 최저 급여가는 1134만원 수준이다. 국내에서 건보가 적용되면 환자는 이 비용의 10%만 부담하면 된다. 해당 신약은 12세 이상에게 허가됐으나 소아·청소년만 해당하는 급여 경평 면제 기준이 적용되면 환자의 접근성에 한계가 생길 수밖에 없다.
민수진 한국유전성혈관부종 환우회장은 4일 “환자 삶의 질을 완전히 뒤바꿀 수 있는 치료제가 있는데, 현재로선 그림의 떡이다. ‘높은 비용’이라는 현실의 벽 앞에서 신체 고통에 더해 정신적으로 매우 힘들어하는 환자들이 많다”고 호소했다. 그는 “새 정부 들어 중증·희귀질환에 대한 보장성 강화가 이뤄질 것으로 기대했는데, 성인 환자는 소외되는 상황이 절망적”이라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국감서도 문제 제기… 정부 “신중”
이 밖에도 국내에 20명 미만 환자가 있는 것으로 파악된 ‘유전성 재발열 증후군’도 문제다. 2015년 만 2세 이상에게 유일한 치료제인 카나키누맙이 허가됐으나 건보 적용이 안 돼 실질적인 사용이 거의 없는 상태다. 지난 8월과 9월, 각각 18개월 소아와 50대 성인 환자 사례를 기반으로 보험 등재를 요청하는 국민 청원이 올라오기도 했다. 10월 국정감사 당시 소아에 대한 급여화에는 정부가 긍정적으로 화답했으나 성인까지 적용될지는 미지수다. 당시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선 경평 면제 제도의 한계점과 개선 방안에 대한 질의가 여러 차례 나왔다. 특히 강선우 더불어민주당 의원실 관계자는 현 정부의 희귀질환 보장성 확대가 극히 제한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점을 지적하며, “지속적인 문제 제기를 통해 빠른 시일 내에 경평 면제 제도 기준이 성인 환자까지 확대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정부 관계자는 “경평 면제 대상을 성인까지 확대하는 것은 사회적 논의를 거쳐 신중하게 추진할 필요가 있다”는 원론적 입장만 밝혔다.
의학계는 경평 면제 제도의 실효성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개선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고 있다. 강혜련 서울대병원 알레르기내과 교수는 “유전성 혈관부종의 경우 소아·청소년기에 생겨도 성인이 된 후 진단받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들에게 근본적인 관리를 위한 장기 예방 치료제는 필수적”이라면서 “경평 면제 대상에 소아 환자로만 기준을 추가한 것이 오히려 성인 환자들의 접근성을 가로막는 상황으로 이어져 안타까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강 교수는 “아쉽게도 현행 제도와 환자들이 진료 현장에서 실제로 느끼는 어려움 사이에 간극이 존재한다. 진단 지연에 치료 과정까지 기약 없는 기다림을 계속해야 하는 환자들의 어려움을 헤아려 지금보다 더 실효성 높은 제도로 개선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민태원 의학전문기자 tw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