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나 스트레스 받아.”
죽은 지 3년째 되는 날 하늘에서 휴가를 받아 딸을 만나러 온 복자(김해숙)가 뒷목을 잡으며 말한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잘 나가는 대학 교수로 사는 줄만 알았던 딸 진주(신민아)가 모든 걸 때려치우고 고향에 내려와 백반집을 하는 모습에 입에서 험한 말이 절로 튀어나온다.
지난달 29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배우 김해숙은 “그동안 엄마 연기를 수도 없이 했지만, 시나리오를 받은 순간 지금까지 해보지 않은 엄마란 생각이 들었고, 이 세상의 모든 엄마를 대표해 복자를 연기하고 싶었다”며 “그런 딸의 모습을 보는 엄마 마음은 현실적으로 어떨까 생각했다. 예상을 깨고 풀어나가는 부분이 좋았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영화 ‘3일의 휴가’는 신파보다 뜻밖의 웃음을 안긴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복자는 진주를 비롯해 살아있는 사람의 눈엔 보이지 않는다. 한 프레임 안에 있는 배우들이 대화를 주고받는 게 아니라 각자 떠드는 코믹한 상황이 계속해서 연출된다.
김해숙은 “복자는 자신을 볼 수 없는 딸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화내고 욕한다. 진주는 보이지 않는 엄마에게 원망의 말을 쏟아낸다. 그야말로 각자 퍼붓고 앉아있었다”며 “배우들이 고민이 많았다. 영화가 슬프기만 하면 관객들이 ‘그러면 그렇지’ 할 텐데, 그렇게 단순하게 보여드리고 싶지 않았다”고 돌이켰다.
이어 “우리는 최대한 울지 않으려 했다. 이 영화를 보고 슬프게 느낀다면 관객들 각자의 이유가 있을 텐데, 그건 그냥 눈물이 아니라 아픈 눈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심스레 덧붙였다.
영화를 찍으면서 그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많이 떠올렸다. 김해숙은 “가족들은 서로 상처를 주고받고, 그 감정을 풀지 못한 채 갑자기 이별한 뒤 상실감, 후회를 느끼곤 한다”며 “엄마 역을 맡았지만 나도 누군가의 딸이라 진주가 꼭 나처럼 느껴졌다. 시사회에 왔던 딸은 ‘엄마, 진주가 나네’라고 하더라”고 말했다.
김해숙은 ‘국민 엄마’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지만 중견 배우 가운데 ‘스타일리시’한 연기를 하는 손꼽히는 배우이기도 하다. 그는 영화 ‘도둑들’(2012)의 씹던 껌, ‘박쥐’(2009)의 라 여사 등 강렬한 배역을 맡아왔다. 최근 ‘힘쎈 여자 강남순’ ‘악귀’ 등에서도 인상 깊은 연기를 펼쳤다.
그는 “‘국민 엄마’라는 타이틀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다. 감사한 일”이라면서도 “예전에는 할 수 있는 역할이 엄마로 한정돼 있었지만 다양한 캐릭터를 할 수 있는 시대가 와서 행복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무방비도시’(2008)에서 엄마 만 할 수 있는 배우가 아니라는 걸 보여줬고, 그다음 터닝포인트는 ‘박쥐’였다. 그리고 씹던 껌으로 정점을 찍었다”고 말했다.
1975년 데뷔한 김해숙은 어느덧 연기 인생 50년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지금도 연기할 때 떨리고 긴장된다고 하면 후배들이 깜짝 놀란다. 소중하고 사랑하는 일이라서 그렇다”며 “연기가 아직도 재밌다. 새 배역이 들어오면 가슴이 뛰고, 어떻게 표현하지 고민하고 준비할 때 가장 행복하다”고 했다.
김해숙은 “아직도 내 안에 새로운 것이 있을 거라 믿는다. 이 나이라서 다행이지 젊었으면 일 냈을 것”이라며 유쾌하게 웃었다.
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