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신저 전 장관은 1960, 70년대 세계 외교무대를 누비며 미국과 소련(현 러시아)의 전략핵무기 감축 협상을 주도하고 미·중 수교를 이룩한 인물로, 지금까지도 현실주의 외교의 전설로 불린다.
가장 큰 업적으로는 리처드 닉슨 행정부의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일하며 1972년 중국과의 수교를 이뤄낸 ‘핑퐁외교’가 꼽힌다. 그가 중국 최고지도부를 설득해 ‘죽의 장막’을 걷어내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강대강’ 일변도였던 냉전시대는 막을 내렸다. 71년 닉슨 대통령의 특명을 받고 파키스탄 방문 중 비밀리에 베이징을 찾아 17시간 동안 저우언라이 총리와 마오쩌둥 국가주석을 설득하고 이듬해 닉슨 대통령의 방중과 양국 수교를 성사시켰다.
그는 존 F 케네디 행정부 시절 핵전쟁 직전까지 이르렀던 미·소의 전략핵무기 개발 경쟁 구도를 깨는 데도 지대한 공을 세웠다. 72년 소련과의 1차 전략무기제한협정을 성사시켜 동서 데탕트(긴장완화)의 서곡을 울린 것이다. 당시 주미 소련대사 아니톨리 도브리닌을 시작으로 1인자였던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소련공산당 서기장까지 만나 비밀협상을 벌일 만큼 주도면밀하게 움직였다.
미국의 최대 골칫거리였던 베트남전을 끝낸 일도 키신저의 현실주의 외교노선을 잘 보여준 사례다. 73년 미군의 베트남 철수협정을 이끈 그는 베트남 협상대표인 레득토와 함께 그해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한국과도 친했던 키신저는 한·미 관계 발전에 기여한 인물에게 수여되는 밴플리트상을 2009년 수상했다. 75년 유엔총회에서 한반도 긴장완화를 위한 미·일·중·소 4자회담 개최를 제안했고, 자주 방한해 현직에 있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과 만났다.
90세가 넘어서도 해외순방을 멈추지 않고 시진핑 중국 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정기적으로 만나는 등 말년까지 외교가의 거물로 활동했다. 특히 그가 중국을 방문한 횟수는 100차례에 달한다.
1923년 독일 바이에른주에서 유대인 교사 부모 사이에 태어난 그는 15살 때인 38년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뉴욕으로 이주했다. 이후 54년 하버드대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69년 닉슨 행정부의 국가안보보좌관으로 발탁되기 전까지 하버드대 정치학 교수로 재직했다. 69년부터 75년까지 공화당 행정부의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일했고, 73년부터는 국무장관도 겸임했다.
70년대 제4차 중동전쟁 때는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를 오가며 중재자 역할을 했고,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이의 휴전을 유도했다. ‘셔틀외교’란 용어도 이때 만들어졌다.
그의 지론은 ‘현실정치(Realpolitik)’로 요약된다. 그는 평소 “미국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 오로지 국익만이 존재한다”고 말해 왔고, “아무리 불완전하더라도 협력을 통한 힘의 균형과 세계 질서 유지가 혼돈과 혁명보다 낫다”는 소신을 고수했다.
뉴욕타임스는 “그가 미국 외교의 지평을 넓혔고 미국 외교의 황금시대를 구가하게 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고 평가했다. 정치학자 로버트 캐플린은 키신저를 “미국이 펼치고 싶은 것이 아닌, 펼쳐야만 하는 외교정책을 펼친 인물”이라고 표현했다. 워싱턴포스트는 “비할 데 없는 지배력을 발휘한 탁월한 외교관이었지만, 그의 노선을 도덕관념이 없다고 보는 비판 세력의 공격을 수도 없이 받았다”고 전했다.
신창호 선임기자 proco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