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숲에 한 신선이 살았습니다. 신선은 키가 크고 무성한 나무 곁에 앉아 있는 벌목꾼에게 물었습니다. “이 나무는 몇 백 년생은 족히 되는데 왜 자르지 않소?” 벌목꾼이 대답했습니다. “크기만 했지 쓸모가 없거든요.”
신선은 생각했습니다. “이 나무는 질이 나빠 쓰이지 못하는구나. 그래서 장수할 수 있었구나.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참 한심하다. 그렇게 바쁘게 열심히 산다 해도 수명이 길지 못하니 얼마나 가련한가! 차라리 나무처럼 무익하면 오래 살 것을!”
그때 나무가 말했습니다. “난 장수하는 걸 좋아하지 않소! 나의 벗들은 베어져 튼실한 집의 기둥이 되거나 강에 놓인 다리가 되거나 바퀴가 되어 천 리 길을 달린다오. 그들은 사람에게 기쁨을 주지 않소? 그런데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햇빛과 비만 헛되이 받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소!”
나무는 벌목꾼에게 애원하였습니다. “날 가엾게 여겨 땔나무로라도 써 주시오. 그 빛과 열기 속에서 웃으며 죽을 수 있을 거요.” 벌목꾼은 도끼를 들고 일어섰습니다. 신선은 낯을 붉혔습니다. 불로장생하는 자신이야말로 폐물이라고 자각하면서!
2023년을 한 달 남겨둔 지금 마음이 스산합니다.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지 자책하게 됩니다. 물론 바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바쁜 것과 열심히 사는 것은 꼭 같은 뜻은 아닙니다. 바쁘지만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등한한 채로, 하지 않아도 될 일을 따라 다닌다면 그것은 바쁘기만 할 뿐 열심히 사는 것은 아닙니다.
바쁜 나머지 말씀도 읽지 못하고 사명도 감당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큰 잘못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을 때 게으른 본능을 억제하고 부지런히 살아야 한다는 의미도 포함돼 있다고 생각됩니다.
슈바이처는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아프리카로 갔습니다. 그가 쓴 책 ‘물과 원시림 사이에서’를 보면 그가 그곳으로 간 것은 단지 인류애나 박애정신 때문이 아닙니다. 그 배후에는 슈바이처의 독특한 종말론이 있습니다.
19세기 유럽인들은 과학의 발전과 이성적 윤리를 통해 세상에 낙원을 세울 수 있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낙관적 세계관이 지배하던 당시에는 종말론이 설 자리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슈바이처는 종말을 생각했습니다.
학자들은 그의 종말론을 ‘철저 종말론’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산상수훈을 순종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는 “평소라면 산상수훈의 윤리를 지킬 수 없겠지만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생각하면 충분히 그 말씀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당장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온다는 긴장감으로 아프리카로 들어갔습니다.
오래전 한 유명한 목사님께서 월요일마다 친구 목사님들과 모여 성경 시험을 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성경공부도 아니고 단지 성경 내용을 테스트하는 것이지요.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그렇게 해서라도 성경을 집중해서 읽기 위함이라고 들었습니다. 성경을 읽기 위한 고육지책인 셈입니다. 자신을 채찍질하는 목사님의 이야기에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남산 순환도로를 지날 때마다 이파리가 다 떨어져 앙상해진 은행나무가 우리 모습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남은 시간을 종말적 긴장감으로 살길 원합니다. 주님 앞에 설 때 조금 덜 부끄럽기 위해 주님 뜻을 따라 열심히 살아가길 다짐해 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존적 종말론이 될 것입니다.
(영락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