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정중앙 양구에서 백자로 통일을 빚다

입력 2023-12-02 03:01
도예가 이상철 작가가 최근 강원도 양구 백자박물관에서 열린 ‘통일 백자’ 전시회 현장에서 북한의 회령 도자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양구=신석현 포토그래퍼

한반도의 배꼽. 대한민국 강원특별자치도 양구군의 애칭이다. 한반도 남쪽 끝 마라도와 북쪽 끝 함경북도 유원진, 동쪽 끝 독도와 서쪽 끝 마안도의 정중앙에 자리 잡고 있어 해마다 ‘양구 배꼽축제’가 열리기도 한다. 군내에 국토정중앙면(國土正中央面)이란 이름의 행정구역이 있을 정도다.

양구가 중심에 서 있는 키워드는 하나 더 있다. 바로 조선백자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관요(官窯·왕실용 도자기를 구워내기 위해 국가가 직영 관리했던 가마)의 백자 생산에 쓰였던 백토가 이곳에서 발원했다. 양구를 대표하는 문화 공간으로 양구백자박물관(관장 정두섭)이 꼽히는 이유다. 조선백자의 본고장으로 알려진 양구가 최근 문화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출발선에 섰다. 남과 북의 도예가가 만나 하나의 한반도를 꿈꾸며 ‘통일 백자’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 기적 같은 이야기의 중심엔 신앙과 한국교회의 섬김이 있었다.

남과 북의 경계선에서 만난 탈북 도예가

가을의 정취를 내려놓고 겨울옷을 입기 시작한 삼악산 오봉산 굽잇길을 지나 양구백자박물관에 도착하자 2층 높이의 벽면을 가득 채운 전시 현수막이 한눈에 들어왔다. 현수막에는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백자 사진들 위로 ‘탈북 도예가 리상철의 염원, 통일 백자’가 흰색 글씨로 쓰여 있었다.

“먼 길 오셨습니다. 이상철입니다.”

이상철 작가가 고물상에서 구한 회전의자를 개조해 만든 물레 앞에서 지나온 역경의 순간을 소개하는 모습. 양구=신석현 포토그래퍼

청화 백자의 안료를 닮은 푸른 빛 니트티에 재킷을 걸쳐 입은 도예가 이상철(59)씨가 미소를 머금고 인사를 건넸다. 그의 안내를 따라 박물관 기획전시실에 들어서자 무의식적으로 탄성이 새어 나왔다. 이씨의 손으로 빚은 70여점의 크고 작은 백자들이 영롱한 조명을 받으며 저마다의 굴곡과 몸통에 새겨진 형상을 빛내고 있었다. 백자들 사이로 빛깔과 굴곡의 결이 다른 도자기가 눈길을 끌었다.

“자기의 어깨선에 뭔가 흘러내리고 있는 느낌을 주지요. 제 고향 함경북도 회령 도자기입니다. 일반적인 옹기를 만드는 기법으로 제작하면서 볏짚을 태워 만든 유약을 위에서 두껍게 발라 눈물처럼 흘러내리게 하는 것이지요. 장독과 비슷한 형태에서 짙게 빛나는 색감이 뿜어져 나오는 게 일품입니다.”

김일성에게 진상하던 도예가의 위기

1964년 회령에서 태어난 이씨는 유년 시절부터 그리기와 만들기에 재능을 보였다. 그는 “도예라는 게 뭔지도 모르던 때부터 동네 흙을 모아 물항아리처럼 만들던 게 천직이 됐다”고 회상했다.

북한 유일의 도자기 단과대학인 경성도자기단과대학에서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은 이씨는 회령의 도자기 공장에서 일하며 각종 생활도자기를 제작했다. 도예와 조각 실력이 정평이 나면서 그의 작품은 중앙당과 김일성에게까지 전달되기도 했다. 하지만 10년 넘게 이어지던 도예가로서의 삶은 한순간에 위태로워졌다.

“수중에 돈이 없을 때 병환으로 고생하던 어머니를 도와주신 한의사가 있었습니다. 그분이 긴히 부탁을 하더군요. 사고로 죽은 둘째 아들을 사진으로만 그리워하고 있는데 조각상을 하나 만들어 줄 수 있겠느냐고요. 고맙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흉상을 만들어 드렸는데 그게 탈이 났지요.”

김일성 외에는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없었던 시절, 이씨가 만든 흉상은 주체사상에 어긋나는 이단적 물건으로 취급받았고 그 일로 이씨는 1년 동안 매주 공개 비판 무대에 올라야 했다. 그는 “이러다간 언제 목숨줄이 끊어질지 모르겠다 싶어 자유로운 남한에서 도예가로서의 꿈을 이어가야겠다고 결단했다”고 말했다.

20년 세월 끝자락서 만난 기적

2004년 탈북해 남한 땅을 밟았지만 그가 꿈꿨던 ‘도예가 이상철’로서의 삶은 냉혹한 현실에 묻혀야 했다. 당장 생계를 위해 식당 일용직, 건축 현장 노동, 용접공, 버스 운전 등 가리지 않고 일을 해야 했다. 팍팍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도 끝내 내려놓지 못한 꿈을 위해 그는 고물상에서 구한 회전의자를 개조해 물레를 만들고 집 한 편에서 도자기를 빚어 올렸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줄기 빛이 찾아왔다.

“남한에 온 뒤로 신앙을 갖게 돼 지구촌교회를 다니고 있었는데 한 장로님이 양구에 있는 박물관에서 북한 도예가를 찾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주셨어요. 그게 바로 ‘통일 백자 프로젝트’였지요. 양구 군수에게 저를 소개하는 이메일을 보내준 것도, 관장님과의 만남을 주선해 준 것도, 변변한 수입이 없는 상황에서 도예 작업에 집중할 수 있게 양구에서의 생활을 지원해 준 것도 교회였습니다.”

이뤄진 꿈, 그리고 이뤄나갈 꿈
이상철 작가가 양구 지역 백토로 제작한 백자들. 양구=신석현 포토그래퍼

남한의 바람이 만들어 준 백토, 남과 북이 만나는 곳에서 흐르는 물, 남북의 도예가가 만나 빚어놓은 백자들은 이씨가 새기고 그린 다양한 작품을 담고 있다. 그는 “구름을 박차고 날아가는 용을 그릴 때도, 용맹한 호랑이의 울부짖음을 그릴 때도 작품의 배경이 되는 하늘엔 하나님을 새기는 마음으로 임했다”고 설명했다. 지난달 26일 양구백자박물관에서 1개월여간의 통일 백자 전시회를 마친 그는 2일부터 17일까지 지구촌교회(최성은 목사) 수지채플 전시실로 공간을 옮겨 개인전을 이어간다.

이씨의 작품엔 유독 한 쌍의 동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남북의 통일을 상징적으로 담아내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중 한 화병엔 용 두 마리가 등을 마주한 채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려는 모습이 표현돼있다.

“화병은 꽃이 있어야 비로소 완성됩니다. 빈 화병에 등지고 있는 두 마리 용은 통일을 꽃피우지 못한 채 남북이 갈라져 있는 미완성을 상징하지요.”

이상철 작가가 제작한 화병. 두 마리의 용이 등지고 있는 모습이 갈라진 남과 북을 표현한다. 양구=신석현 포토그래퍼

박물관 인근에 마련된 그의 작업실 벽면 한편에서 그가 이루고 싶은 꿈이 담긴 도안(圖案)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두 마리의 용이 서로 마주 보고 있는 화병 모습이었다. 남과 북의 경계에 있는 대한민국 양구에서 물레 위 도예가로서의 꿈을 펼치고 있는 이씨가 정치·사회적 경계를 넘어 간절히 소망하는 한반도 통일이 거기 있었다.

양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