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조명환 (17) “전 세계 도움 필요한 아이들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하리라”

입력 2023-11-29 03:04
조명환 회장이 지난해 루마니아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피해 온 피란민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월드비전 제공

월드비전 회장에 취임 후 계속된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해외 출장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처음 방문하게 된 곳은 전혀 생각지 못했던 우크라이나 분쟁 현장이었다. 하루아침에 피란민이 된 이들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거운 마음을 안고 지난해 4월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마주한 루마니아로 향했다.

우크라이나와 루마니아 국경 시레트 지역 모습은 실향민인 나의 부모님들을 떠올리게 했다. 평화롭던 일상을 뒤로하고 낯선 땅으로 가야 하는 피란민들의 모습을 직접 내 눈으로 보게 된 것이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 사람들이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할까. 하나님이 왜 이런 시련을 주시는지 답답했지만 사실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피란민들에게 오늘 하루 배부르게 해줄 식량과 따뜻한 잠자리를 어떻게 마련해 줄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뿐이었다.

국경에서 만난 한 아동이 들려준 이야기는 단지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했다. 아이는 옆집 아저씨, 친구 그리고 가족이 죽는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상황을 설명하던 순간 지나가던 헬리콥터 소리에 아이는 소스라치게 놀라 이야기를 멈추고 고개를 파묻었다. 전쟁은 우리 모두의 삶을 파괴하지만 그중에서도 아이들이 전쟁으로 인해 겪는 심리적 불안과 고통은 더 심각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또 월드비전 회장으로서 이러한 트라우마를 회복시켜야 한다는 소명감도 다시 깨달았다.

루마니아 수도 부쿠레슈티에 있는 최대 규모 난민센터에는 1000㎡ 규모의 식량 창고와 피란민들이 쉬었다 갈 수 있는 침대가 갖춰져 있었다. 루마니아 곳곳에는 월드비전과 같은 NGO, 지역 교회에서 운영하는 난민센터들이 있었다. 특히 월드비전은 아동들을 위한 놀이 공간을 운영하며 잠시나마 그들이 전쟁 공포를 잊고 뛰어놀 수 있도록 돕고 있었다.

여러 곳을 다니면서 저마다 가진 아픈 사연을 듣던 중 이사벨라를 만났다. 이사벨라는 나에게 한국의 아이돌 그룹 블랙핑크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휴대폰을 열어 블랙핑크의 노래를 들려주었더니 어느새 조금씩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어두웠던 얼굴에 잠시나마 미소가 번졌다.

노래가 끝나고 이사벨라는 한국에 돌아가 블랙핑크 제니를 만나거든 꼭 전해달라면서 사과 주스 하나를 나에게 건넸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주스라서 피란을 나오면서 챙겨왔다고 했다. 나는 지금도 그 사과 주스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언젠가 블랙핑크 제니에게 전해 줄 날을 기다리며, 또 이사벨라가 전쟁이 끝난 우크라이나로 돌아가 블랙핑크 노래를 따라 부르며 건강하게 자라나길 기도하며 말이다.

전쟁으로 정부가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월드비전 같은 NGO 역할이 절실했다. 왜 하필 출장도 갈 수 없는 팬데믹 기간에 나를 월드비전으로 보내셨는지 물음표를 가졌던 나에게 하나님은 앞으로 내가 갈 길을 보여주시는 것 같았다. 월드비전 회장으로 처음 떠난 출장에서 하나님은 내게 앞으로 붙잡고 가야 할 사명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셨다. 그 사명에 온전히 헌신하며 전 세계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한 명이라도 더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하리라 굳게 다짐했다.

정리=박용미 기자 m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