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살이 되던 2021년, 아인(8)이의 팔과 다리에 이유 모를 멍이 보이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부딪혔는지 물어봐도 그런 적이 없다는 대답뿐. 다리를 휘감은 시퍼런 멍 자국은 한 달이 지나도록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커져 있었다. 동네 소아과에서는 상급병원으로 옮겨 정밀 진단을 받으라고 권했다. 불안한 마음으로 향한 대형병원. 결과는 백혈병이었다.
서울 용산구 충신교회(이전호 목사)에서 교육부서를 맡은 권복음(40) 목사 가족의 이야기다. 코로나 팬데믹이 기승을 부리던 2021년 첫째 아인이가 급성림프모구성 백혈병을 진단받았다. 올해로 3년째. 예기치 못한 투병 생활은 가족의 삶을 바꿔놓았다. 권 목사의 아내 강윤미(34) 사모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며 “멍이 든 것 말고는 발열이나 별다른 증상 없이 잘 지내던 아이가 하루 아침에 눈앞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고 했다. 하지만 의사로부터 진단명을 들은 부부의 입에서는 뜻밖에도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강 사모는 “더 큰 상황이 벌어지기 전에 병원에 올 수 있었고 아이가 치료를 시작할 수 있었다는 것이 무엇보다 감사했다”고 말했다.
생명을 건 모험, 골수이식
권 목사 가족을 지난 21일 서울 강남구 서울성모병원에서 만났다. 정기검사가 있던 날이었다. 대부분의 수치가 정상이었다. 탯줄혈액 이식 2년째를 앞둔 상황에 나온 결과라 가족들의 표정이 밝았다. 강 사모는 “이식 2년이 지나면 백혈병 재발률이 현격히 줄어든다는 통계가 있다”며 “그렇다고 맘을 놓을 순 없지만, 올해 아인이가 등교를 시작했고 점차 일상을 회복하고 있어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지금이야 웃을 수 있지만, 지난 2년여를 돌아보면 아찔한 순간들이 많았다. 아인이의 경우 전체 백혈병 환자 중 3%의 확률로 나타나는 ‘필라델피아 변이유전자 급성’이었다. 병의 진행이 매우 빠르고 공격적인 특징을 갖는 희귀 백혈병이다. 골수 이식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권 목사는 “골수이식은 생명을 걸고 하는 모험”이라고 했다. 평상시 우리 몸을 지키는 면역력이 골수 이식 환자에게는 오히려 가장 까다로운 상대가 되기도 한다. 타인의 세포가 몸 안으로 들어왔을 때 나타나는 숙주 반응 때문이다.
아인이도 이식 초기에 장에서 나타난 숙주 반응으로 고생을 했다. 그 일로 두 달을 꼬박 병원에서 보냈다. 코로나로 보호자의 출입이 자유롭지 않은 상황에 침대도 없는 병상에서 강 사모는 아인이를 병간호했다. 크리스마스와 새해 첫날을 모두 병원에서 맞이했다. 강 사모는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라며 “둘째 이든이에 대한 돌봄 문제, 치료비와 생활에 필요한 경제적인 부분까지 어려운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신앙·가족, 감사의 원동력
가족들은 어려운 과정을 잘 이겨내고 있다. 신앙과 가족이 가장 큰 힘이 됐다. 강 사모는 “신앙은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일으켜 세워주는 커다란 원동력이었다”며 “함께 아픔을 싸매고 힘을 내는 가족이 있어 매 순간 용기를 낼 수 있었다”고 했다.
병실에서 만난 다른 소아암 환우 가족들은 든든한 공동체가 됐다. 아인이는 “처음 병원에 올 때만 해도 그렇게 오래 있을 거라고 생각을 못 했다”며 “저보다 어린 동생들도 많았고, 친절한 형 누나들이 있어서 행복했다”고 했다. 강 사모는 “신앙 여부를 떠나 병실에서 참된 공동체를 경험했다”며 “생명이라는 1차원적 문제 앞에서 서로가 같은 마음으로 응원을 하다 보면 너의 일이 나의 일이 되는 굉장한 연대감이 생긴다”고 설명했다.
권 목사는 “너무 힘들어서 다 포기하고 싶어질 때마다 주변에 계신 많은 분, 특히 충신교회 성도들께서 함께 기도해주시며 사랑으로 위로해 주신 덕분에 연약한 우리가 무너지지 않고 감사함으로 치료 과정을 통과해 올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용기를 달라는 기도의 힘
권 목사에게 아인이와 관련해 예배 설교를 해달라는 부탁이 종종 들어온다. 강 사모 역시 책을 써보자는 제안이나 방송 출연 섭외를 자주 받는다고 했다. 불확실한 미래 탓에 처음에는 대부분 거절을 했다. 권 목사는 “백혈병은 재발이 워낙 많은 질병이기에 섣부른 일이 될까 봐 우려가 컸었다”고 했다.
그러나 최근 권 목사는 용기를 내 아인이와 관련한 설교를 들고 강단에 섰다. 권 목사는 “이 시간을 통해 우리 가족 모두가 믿음에 대해 돌아보게 됐다”며 “분명한 것은 신앙 생활을 아무리 잘한다고 해서 고난이 비켜가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강 사모도 “어느 순간부터 살려달라는 기도 대신 용기를 달라는 기도가 나오더라”며 “우리 가족이 겪은 일들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조심스럽게 용기를 내보려고 한다”고 말을 이었다. 이어 “병을 이긴 사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버틸 힘이 되더라”며 “아인이를 위해 기도한 모든 분께 회복 중이라는 이야기를 드릴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덧붙였다.
글·사진=손동준 기자 sd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