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했다. 일본 정부에 대한 한국 재판권을 인정할 수 없다는 1심 패소 판결이 뒤집힌 것이다.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상대 소송에서 승소한 건 두 번째다. 일본 정부의 무대응 원칙으로 실제 배상까지는 험난한 길이 예상된다.
서울고법 민사33부(재판장 구회근)는 23일 이용수 할머니와 고(故) 곽예남 할머니 유족 등 16명이 낸 손해배상 소송 항소심에서 1심을 깨고 원고 승소 판결했다. 원고들이 청구한 1명당 2억원의 위자료가 모두 인정됐다. 소송비용도 일본 정부가 부담하도록 했다.
1·2심 판단을 가른 쟁점은 ‘국가면제’(주권면제) 규정이다. 주권 국가를 다른 나라 법정에 세울 수 없다는 국제법상 원칙이다. 1심은 이에 따라 소송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봤다. 그러나 2심은 “국가 영토 내에서 그 나라 국민에게 발생한 다른 나라의 불법행위에는 국가면제를 인정하지 않는 국제관습법이 존재한다”며 판결을 뒤집었다. 이어 “피해자들은 최소한의 자유조차 억압당한 채 일본 군인과 원치 않는 성행위를 강요당했다”며 “위안부 동원 과정에서 피고의 불법행위가 인정된다”고 밝혔다.
휠체어를 타고 방청석에서 선고를 들은 이 할머니는 선고 후 법정 밖에서 만세를 외치며 눈물을 흘렸다. 그는 “하늘에 계신 할머니들도 내가 모시고 감사를 드린다”고 말했다.
다만 배상금을 받기까지는 갈 길이 멀다. 일본 정부가 자발적으로 배상하지 않으면 판결문을 근거로 한국 내 일본 재산을 강제집행해야 한다. 그런데 법원은 유사 소송에서 ‘재판에 이겼어도 일본 상대 강제집행은 국제법 위반’이라는 취지 결정을 내렸다.
서울중앙지법 민사34부는 2021년 1월 이옥선 할머니 등이 일본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고, 판결이 확정됐다. 하지만 재판장이 바뀐 후 그해 3월 강제집행 절차에서는 국가면제가 인정된다고 보고 ‘소송비용을 일본으로부터 받아낼 수 없다’고 밝혔다.
이후 피해자들은 강제집행 가능한 한국 내 일본 재산을 밝혀달라며 ‘재산명시’ 신청을 냈다. 관련 서류가 일본 법무성에 전달됐지만, 법무성은 ‘서류 송달이 일본 주권을 침해한다’며 거부했다. 사건은 각하됐고, 항고심은 답보 상태다. 재경지법의 한 판사는 “원론적으로는 피해자들이 한국 내 일본 재산을 찾아내 강제집행을 신청할 수 있지만, 이 역시 해당 재판부의 국가면제 판단에 달려 있다”고 설명했다. 한 중견 변호사는 “강제집행은 국가 주권을 더 많이 침해한다고 볼 수도 있어 더 까다로운 단계”라고 말했다.
이번 소송을 대리한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이상희 변호사는 “국제사회가 일본에 책임을 함께 물을 수 있는 동력이 될 수 있다는 데 판결 의미가 있다”며 “강제집행 절차는 열어놓고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 강제동원 피해자 사건의 경우 2018년 10월 일본 기업의 손해배상 책임이 확정됐지만, 자산 강제 매각을 위한 절차가 아직 진행 중이다.
양한주 기자 1wee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