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피해자 60대 A씨는 지난해 말 백기남 금융사기피해지원협의회 협회장을 찾아왔다. A씨는 500명 가까운 피해자를 낳은 M사 비상장주식 사기사건의 피해자 중 한 명이었다. 노후자금 1억여원을 잃은 A씨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백 협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기 피해자의 무료 고소를 돕는 행정사인 백 협회장은 “돈을 찾을 수 있게 잘 돕겠다”며 A씨를 안심시켰다.
그로부터 한 달 뒤 A씨 번호로 다시 연락이 왔다. A씨 아들이었다. ‘준비 잘하고 있다’고 말하려던 찰나 수화기 건너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말이 돌아왔다. A씨는 극단적 선택으로 삶을 마쳤다.
백 협회장은 23일 국민일보에 “3년간 가상화폐와 비상장주식 사기를 당한 피해자들을 도우며 목격한 극단적 선택 사건만 10건”이라며 “피해자들은 신고도 쉽지 않고, 수사나 재판으로도 피해를 회복할 것이란 확신이 없어 쉽게 절망의 늪에 빠진다”고 말했다.
피해자는 사기를 인지한 순간부터 신고, 수사, 재판까지 오랜 시간 고통에 시달린다. 피해액을 돌려받을 것이란 희망도 이들에겐 사치다. 늘어나는 사기를 막기 위한 대책이 쏟아지고 있지만 정작 피해자에겐 피부에 와닿지 않는다.
피해자들이 사기 피해를 인지하고 가장 먼저 찾는 곳은 경찰서다. 그러나 소액 사기사건은 환영받지 못한다. 피해자에게 교묘한 수법으로 책임을 돌리는 사기 수법의 경우 경찰에서 사건 접수 자체를 꺼리기도 한다.
박모(54)씨는 ‘제휴 사이트에서 게임만 하면 로또 번호를 추천해주겠다’는 말에 속아 3900만원을 잃었다. 해당 사이트는 불법 도박사이트였지만 그는 이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경찰은 “불법도박을 한 것 아니냐”며 사기 피해를 호소한 그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다 돌려보냈다.
어렵게 경찰에 사건을 접수해도 신속한 수사를 기대하긴 어렵다.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접수된 사기사건 22만5307건 가운데 한 달 이내에 처리된 건수는 2만9034건으로 12.8%에 불과했다. 반면 6개월을 초과한 건수는 7만3986건으로 32.8%에 달했다.
300여명이 500억원 이상 뜯긴 가상화폐 ‘티어원’ 사기사건은 고소한 지 2년이 지났지만 검찰은 방대한 피해 규모 등 영향으로 아직 사건기록조차 보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사기사건은 전국 단위로 일어나다 보니 특정 경찰서에서 흩어져 있는 피의자를 검거하고 피해 사실을 확인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이 사건 피해자 법률대리인인 박지윤 담덕 변호사는 “고소하고 1~2년이 지나도 수사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피해자들은 처벌만이라도 해 달라는 자포자기 심정이 된다”며 “수사뿐 아니라 재판도 오래 걸리는데 대출까지 받아 투자한 피해자들은 이자를 갚느라 허리가 휜다”고 전했다.
더딘 수사에 답답한 피해자로선 직접 사건을 공론화하려 하지만 방해와 협박도 만만치 않다. 미국 복권번호 추천 사기 피해자인 B씨는 자신의 블로그에 범행을 고발하는 글을 올렸다가 사기 일당으로부터 ‘글을 지우지 않으면 합성 음란물을 만들어 유포할 것’이라고 협박을 당했다.
사기 일당이 법을 이용해 역으로 고소하는 사례도 있다. 수백억원대 피해가 발생한 ‘패스토큰’ 다단계 가상화폐 사기 피해자를 돕는 공익제보자 황모씨는 사기 혐의 피고인들로부터 명예훼손과 업무방해 혐의 등으로 2년간 6건의 고소를 당했다. 황씨는 “계속해서 경찰서로 불려가다 보니 익명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재환 정신영 기자 j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