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님 수업이 없었다면 저는 죽었을지도 몰라요.”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0년 12월 정은진(49) 진로와소명연구소장은 30대 초반의 자립준비청년(보호종료아동) A씨가 한 말을 듣고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했다. 팬데믹으로 관계가 단절되고 아르바이트 등 생계 기반을 잃어버린 자립준비청년들이 누구보다 큰 타격을 받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당시 이들을 비롯해 선교사와 ‘독박 육아’를 하는 여성 등을 대상으로 비대면 수업을 진행하던 정 소장은 자립준비청년들에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자신의 심리상태를 조심스레 밝힌 A씨는 매달 아르바이트를 하며 근근이 살고 있었다. 당시 그는 “1년 정도 매달 100만원에 달하는 생활비가 지원된다면 열심히 공부해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싶다”는 말을 정 소장에게 전했다고 했다.
정 소장은 이 청년을 위해 ‘크리스마스의 기적’을 만들기로 했다. 비대면으로 ‘아름다운 작당 북토크’를 열었고 여기에 참가한 이들을 대상으로 취지를 설명하고 모금을 했다. 이날 모인 금액으로 A씨가 1년간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데 지원했을 뿐 아니라 9명의 자립준비청년을 돕는 데 마중물로 사용했다.
1년간 생활비 걱정 없이 학업에 매진한 A씨는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취득해 취업에 성공했고 가정도 일궜다. 무기력한 생활을 반복하던 A씨에게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자립준비청년을 위한 선한 프로젝트는 이듬해에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정 소장은 2021년 12월 두 번째 북토크를 열었다. 장애가 있는 동생을 돌보며 막노동으로 학비를 버는 네팔의 한 청년의 사연이 접수됐다. 또 다른 20대 초반 자립준비청년 B씨는 자신이 일하던 사업장 고용주가 B씨 명의로 사업자를 냈다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1억원 가까운 빚을 지고 있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갚을 수 없는 수준의 돈이었다. 정 소장은 B씨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특별팀을 구성했고, 국가권익위원회를 통해 이 문제를 매듭지을 수 있었다.
이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도 ‘아름다운 작당’ 프로젝트를 통해 연결된 선한 사마리아인들이 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두 번째 모금으로 네팔 청년과 B씨 등 12명의 자립준비청년을 지원했으며 이들을 위한 전문 코치진을 구성해 진로 상담도 했다. 지난해에는 세 번째 북토크를 열어 17명의 자립준비청년에게 희망을 선물했다.
지난 20일 경북 포항시 남구 ‘오두막, 상담과 환대의 집’에서 만난 정 소장은 “선한 마음을 가진 어른들이 많은데 자립준비청년 등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만나기 어렵다”며 “중간에서 이 둘을 이어줄 믿을 만한 다리가 필요한데 ‘아름다운 작당’ 프로젝트가 그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이 프로젝트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자립준비청년을 볼 때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상담과 코칭 분야에서 20년 이상 활동해 온 정 소장은 ‘라이트하우스 오두막(남포항) 교회’ 사모다. 그는 2021년부터 현장 요청으로 보육원 등 아동양육시설에서 일하는 실무자를 위한 양육 가이드북 ‘초등학생의 꾸물거림에 대하여’ ‘말하기와 보상’을 펴냈다. 세 번째 책 ‘ADHD, 트라우마, 상실과 애도’도 출간할 예정이다.
정 소장은 “누구든지 20대 초중반에는 시행착오를 경험하는데 자립준비청년은 시행착오를 잘못 겪으면 주변에 아무도 없어 절벽에 몰릴 수 있다”며 “이들은 기관의 재정적 지원을 조금이라도 받기 위해 학점 등 성과를 보여야 한다는 압박감이 심하고 결국 불안정한 심리상태에 빠진다”고 밝혔다.
정 소장은 다년간 경험을 통해 자립준비청년이 진정한 자립을 이루려면 무엇보다 안정적인 관계와 최소한의 재정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봤다. 특히 인간관계에 취약한 이들이 정서·심리적으로 안정적 상태가 되려면 무엇보다 믿을 만한 어른 한 명이 자립준비청년 여러 명과 한 그룹을 구성해 장기간 관계를 맺는 게 필요하다고 했다.
문제는 이들 주변에서 믿을 만한 어른 한 명을 만나기 힘들다는 점이다. ‘아름다운 작당’ 프로젝트가 자립준비청년을 전문적으로 코치하기 위해 지난해 국제크리스천코치협회를 창설한 이유다. 협회에 소속된 코치진 70여명이 전국 각지에서 자립준비청년을 만나고 있다.
정 소장은 다음 달 15~16일 부산에서 자립준비청년을 위한 워크숍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 7월 경북 경주에서 열린 ‘아름다운 청년 1차 엠티’에 참석한 자립준비청년들이 연대하는 모습을 보며 후속 모임을 준비하게 됐다.
“자립준비청년들에게 안전한 연대 속으로 들어오라고 권하고 싶어요. 어디를 어떻게 가야 할지 향방을 모르는 자립준비청년과 함께하고 싶은 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습니다.”
포항=글·사진 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