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노란 잎을 떨어뜨리며 겨울 맞을 채비를 재촉하는 나무가 은행(銀杏)이다. 은행은 ‘은빛 살구’를 의미한다. 열매가 살구를 닮아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세계적으로 1종 1속만 있고,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식물이어서 ‘살아 있는 화석’으로 불린다.
한국의 서원과 정자에 많은 은행나무가 자라고 있다. 공자(孔子)가 살구나무 아래 행단(杏壇)에서 제자를 가르친 데 기원한다. 수명이 1000년 이상이고 가을에 열매를 수확하면 경제적으로 도움이 돼 은행나무를 많이 심었을 수도 있다.
은행나무 단풍으로 인기를 끄는 곳 중 하나가 경남 밀양의 금시당·백곡재다. 금시교 인근 주차장에서 보면 큰 은행나무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지난해 노랗게 물들었던 시기인데 반해 올해는 아직 푸른빛이 강하다. 절정의 시기가 되면 은행나무는 하루 사이에도 잎을 모두 떨어뜨린다.
밀양강변 언덕에 자리한 금시당 초입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숲속에서 아름다운 풍광을 펼쳐놓고 있다. 낮은 돌계단을 올라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오른쪽에 협문이 나있다. 협문으로 나가면 널찍한 마당이 펼쳐진다. 금시당 정원은 조용하고 절제된 운치와 여백의 미를 자랑한다.
마당의 저편 끝 모서리에 하늘 가득히 퍼져서 자라난 은행나무가 서있다. 460여 년 자란 나무의 풍채가 일체의 공간을 뒤덮어버린다. 1566년 조선 중기 문신이었던 이광진 선생이 직접 심었다고 전해진다. 선생은 ‘중종실록’과 ‘인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병조 좌랑과 정랑을 지낸 인물이다. 그 옆엔 배롱나무가 담장 너머로 몸을 빼고 강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 사이 선비들이 추구하던 맑은 정신을 대변한 하얀 껍질의 백송이 푸르름을 뽐내고 있다.
뒤돌아보면 이광진 선생이 세운 금시당이 있다. 금시당은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의 ‘지금이 옳고 지난 삶이 그릇됨을 깨달았네(覺今是 而昨非)’라는 구절에서 따온 말이다. 선생은 이곳에 터를 잡고 별서를 경영하고자 했지만 귀향 이듬해인 1566년 금시당의 완성과 함께 54세에 세상을 떠났다. 이후 금시당은 그의 아들 이경홍이 선친의 유지를 이어받아 후진을 양성하는 강학소로 사용했다. 금시당은 임진왜란 때 불탔고 영조 때인 1744년에 이광진의 5세손인 백곡(栢谷) 이지운에 의해 복원됐다.
금시당 옆에서 강을 바라보는 건물은 백곡재(栢谷齋)다. 이용구가 이지운을 추모하기 위해 철종 11년인 1860년에 지은 건물이다. 대청 안쪽에 백곡서재(栢谷書齋) 현판이 있다. 백곡은 이곳 숲을 이룬 아름드리 잣나무에서 따왔다.
금시당에서 밀양강을 따라 상류로 올라가면 단장천과 만나는 절벽 위에 올라앉은 월연정에 닿는다. 조선 중기 한림학사를 지낸 월연(月淵) 이태가 은거했던 곳이다. 그는 한양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외가인 밀양에서 자랐다. 중종 5년인 1510년 문과에 급제했고, 기묘사화가 일어난 1519년에는 함경도 도사로 재직 중이었다. 그는 화를 피해 벼슬을 버리고 이곳으로 돌아왔다.
원래 이곳은 월영사(月影寺)라는 절이 있던 터다. 그는 옛 절터에 쌍경당(雙鏡堂)과 월연대(月淵臺)를 짓고 스스로 ‘월연주인’이라 칭했다. 입구 오솔길을 지나 가장 먼저 만나는 기와지붕이 쌍경당이다. ‘쌍경’은 ‘강물과 달이 함께 밝은 것이 마치 거울과 같다’는 뜻이다. 쌍경당은 임진왜란 때 불탔고 영조 때인 1757년에 후손인 이지복이 복원했다. 쌍경당 옆은 제헌이다. ‘비 갤 제(霽)’자에 ‘추녀 헌(軒)’을 쓴다. 이태의 맏아들인 이원량(李元亮)을 추모해 1956년에 신축한 건물이다. 제헌 앞에도 거대한 은행나무가 서 있다.
제헌 옆 좁은 계곡 너머에는 월연대 정자가 자리한다. 달이 비치는 못가의 정자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고종 때인 1866년 중건됐다고 한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정사각형에 가까운 모양새다. 한가운데에 방이 있고 사방으로 마루를 둘렀다. 흙돌담이 정자 가까이 바짝 에워싸고 있다. 월연대 아래 벼랑을 뒤덮은 수풀 가운데 한 그루 가느다란 ‘백송’이 자리잡고 있다.
월연정 바로 옆에 용평터널이 있다. 1905년 경부선 개통 당시 사용하던 작은 터널이다. 1940년 경부선 복선화로 선로를 이설하면서 일반 도로로 쓰이고 있다. 폭 3m에 총연장 약 130m. 정우성 주연 영화 ‘똥개’ 촬영지다.
터널을 지나 밀양강 상류로 좀 더 올라가면 오연정에 닿는다. 오연(鼇淵)은 ‘자라가 사는 연못’이다. 정자 바로 앞 넓은 잔디밭 가운데 키 큰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햇살 가득한 잔디밭을 융단처럼 덮은 노란 은행잎이 가을임을 알린다.
오연정은 조선 명종 때 성균관 전적 등을 지낸 손영제가 1580년대 벼슬살이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지은 별장이다. 정면 다섯 칸으로, 중앙 두 칸은 대청이다. 누마루와 연접한 한 칸과 오른쪽 두 칸에는 온돌을 들였다. 대청에는 오연정, 누마루에는 남벽루, 측면에 영풍루, 안쪽에 빙호추월 현판이 걸려 있다. 정자는 임진왜란 때와 1717년 두 번 화마에 쓰러졌지만 1771년 후손들이 중건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여행메모
금시당 건너 암새들 은행나무숲
밀양 여행정보 ‘해천상상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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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밀양의 금시당·월연정·오연정 등은 부산대구고속도로 밀양나들목에서 나가면 편하다. 금시당 초입과 금시교 인근에 무료 주차장이 있다. 은행나무 단풍 절정 시기에는 주차난이 심해 일찍 방문하는 것이 좋다. 관람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다. 월연정과 오연정에도 작지만 무료로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모두 무료입장이다.
금시당 건너편은 ‘암새들’이다. 이곳에도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은 아기자기한 은행나무숲이 있다. ‘용평동 265-2’를 찾아가면 된다. 암새들에는 맛집과 카페, 캠핑장 등이 있어 식사하고 쉬어가기에 좋다.
밀양을 여행하는 여행객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지역민에게 휴식을 제공하는 밀양여행문화센터 ‘해천상상루’가 지난 17일 문을 열었다. 인근에는 국보로 지정 예고된 영남루가 있다. 영남루는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조선시대 3대 누각으로 평가된다.
밀양=글·사진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hc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