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의 신’ 양학선에게 “공중에서 무슨 생각이 드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양학선은 망설이지도 않고 “무섭다는 생각”이라고 답했다. 도마를 옆으로 짚고 도약해 3바퀴 반(1260도)을 도는, 세계의 그 누구도 따라하지 못하는 동작을 해내던 선수의 답변이었다. 뭔가 남다른 생각 속에서 뛰는 줄 알았는데 양학선은 “공중에서의 2초가 너무 무섭다”고 반복해 말했다. 어린 시절의 런던올림픽 금메달은 ‘요령 없이 덜컥 얻은 것’이고, 언젠가부터 도마를 향해 달리는 걸 상상하는 이미지트레이닝만으로도 식은땀에 젖는다고 그는 말했다.
점심 자리에 늦은 한 고위법관은 쑥스러운 얼굴로 “증언을 듣다 보니 더욱 궁금해지지 뭡니까”라며 지각한 이유를 설명했었다. 어느 정도는 심증이 형성됐다고 스스로 판단했는데 증인의 말을 듣다 보니 문득 마음이 흔들리고 확신이 사라지더라는 말이었다. 동석한 까마득한 후배 판사를 툭 치며 “나도 이만할 땐 재판을 잘했었다”며 웃었다. 기록만 펼쳐 봐도 ‘무죄구나’ ‘유죄구나’ 잘 보인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세간의 인식과 달리 한동훈 법무부 장관의 검사 시절을 형성한 것도 얼마큼은 두려움이다. 사람들은 그를 몰아붙이는 스타일로 알지만 그는 사실 꼼꼼히 준비하려 애쓰는 쪽이다. 압수수색을 준비할 시간을 많이 주지 않는다고 윗선에 항의한 적도 있다. 후배들에게는 “수사 초기의 ‘로직’이 결국 70% 이상 틀리게 되는 걸 알고 있으라”고 가르쳐 왔다고 한다. 악인이 선의를 발휘하기도 하고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일이 튀어나오는 걸 그는 많이 경험했다. 그는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을 좋아하고 그 책 속에 “고래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내 배에 태우지 않겠다”는 일등항해사 스타벅의 말을 외운다.
신문기자로 일하는 보람은 곳곳의 대가들이 어떠한 마음으로 살아가는지 엿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들의 면모는 한없는 자신감이나 명확함 따위가 아니라 오히려 주저하고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아는 만큼 보이는 세상에서, 많이 볼수록 무서움을 깨닫는 장면이었다. 프로야구 LG 트윈스의 봉중근이 은퇴하며 남긴 말은 “야구공이 무섭다”는 것이었다. 미국프로야구(MLB) 마운드에 섰고 국제대회마다 성적을 올린 그만큼 야구공에 대해 선명히 말할 수 있는 이도 없을 것이다. 거침없이 강하하던 한 베테랑 ‘검은베레’는 언젠가부터 다리가 후들거리더라고 했다. 1000번 이상 강하해야 받는 금장월계 휘장을 단 이후였다.
갑자기 건반이 두려워져 엉엉 울었다는 피아니스트도 있었고 법정에 나갈 때마다 “제게 맡기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친히 판단해 주십시오” 기도를 올렸다는 대법관도 있었다. 한계의 절감은 한계 근처에 있었던 사람에게나 허용된다. 신문사를 다니며 보니 훌륭한 선배들은 오히려 기사 쓰기를 두려워했다. 거침없이 기사를 쓰는 시절은 오히려 초년병 때고 갈수록 단정하기 어려운 세상을 만난다. 취재를 많이 할수록 ‘얘기가 안 되는’ 경우가 있더라는 고민을 들을 때면 내가 그래도 제대로 된 일터에 있구나 생각했다.
모순 없는 태도로 모순을 밝혀야 하듯, 확신 없는 자세로 확신의 말들을 전할 때가 찾아온다. 정치권에서는 매일같이 분명하고 사나운 말들이 서로를 겨냥하고 부딪힌다. 말 잘하는 이들이 쏟아내는 말 속에는 어떠한 좌고우면도 두려움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무슨 후련한 말이 없어서 세상이 이 모양인 건 아닐 것이다. 세상을 무서워하며 용기 있게 한계를 토로하는 대가의 언어를 만나고 싶다.
이경원 정치부 차장 neosar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