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오후 3시 서울 송파구 지하철 잠실나루역 앞. 검은색 암컷 래브라도 리트리버 ‘파랑이’의 시선이 교각 아래 금연구역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남성을 향했다. 이 남성은 자신을 지긋이 바라보는 파랑이가 부담이 됐는지 서둘러 담배를 끄고 자리를 떴다. 견주 최지영(43)씨와 함께 형광 연두색 활동복을 입고 동네 이곳저곳을 누비는 파랑이는 8개월 차 ‘반려견 순찰대원’이다. 반려견 순찰대는 반려견과 견주가 한 팀이 돼 산책하면서 동네 곳곳의 범죄 위험 요소를 살피고 신고하는 주민참여형 방범순찰대다.
서울시 자치경찰위원회와 사단법인 ‘유기견없는도시’가 손잡고 지난해 5월 서울 강동구에서 전국 최초로 시범운영을 시작했다. 현재 서울 전역을 포함해 부산과 대전 일부 지역에서 운영 중이다. 서울에서만 1011팀이 활동한다.
올해 열 살인 파랑이는 인천국제공항에서 오랫동안 탐지견으로 활약하다 지난해 7월 최씨 가족에게 입양됐다. 최씨는 “사람에 대한 거부감이 없고 냄새도 잘 맡는 장점을 가진 파랑이가 은퇴 후에도 의미 있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반려견 순찰대에 지원했다”고 말했다. 엘리트 탐지견 출신답게 파랑이는 지난 4월 열린 반려견 순찰대 2기 선발시험에서 치열한 경쟁을 뚫고 합격자 명단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파랑이와 최씨는 1년 365일 중 360일은 동네 구석구석을 돌며 방범활동을 한다. 집 주변과 잠실나루역 인근, 하천 등이 주요 활동 구역이다. 최씨는 “하루 세 차례 한 시간가량씩 순찰을 한다”고 했다. 이날 순찰 역시 하천변→잠실나루역→집 주변 순으로 1시간30분간 진행됐다.
최씨는 반려견 순찰대 활동복이 주는 힘이 있다고 설명했다. “무단횡단을 하려다가도 파랑이를 보고 신호를 지키는 분이 많다”고 그는 전했다. 이어 “밤 시간대 귀가 중인 어린 학생이나 여성이 파랑이를 따라서 걷기도 한다”며 “파랑이를 보고 안심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최씨는 파랑이가 순찰 활동에 집중하는 동안 고장난 신호등이나 가로등은 없는지 이물질로 꽉 막힌 배수구는 없는지 등을 꼼꼼히 살폈다. 문제점을 발견하면 120다산콜센터에 바로 신고한다고 했다.
지난 8개월간 ‘열심히’ 얼굴을 알린 덕에 파랑이를 알아보는 사람이 부쩍 늘었지만 마냥 환영을 받는 건 아니다. 대형견을 무서워하고 꺼리는 이도 많기 때문이다. 이날도 하천변에서 운동을 하던 한 노인이 최씨를 향해 “개는 저쪽으로 치우라”며 호통을 쳤다.
최씨는 이런 반응이 낯설지 않은 듯 이 노인이 지나갈 때까지 파랑이를 멈춰 세웠다. 파랑이도 바닥에 엎드려 숨을 골랐다. 파랑이는 순찰하는 동안 최씨 지시를 거스르거나 행인 또는 다른 반려견을 향해 짖는 등 위협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최씨는 “반려견 순찰대로 활동하면서 대형견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많이 줄어들었다”며 “‘우리 동네 마스코트’라며 파랑이를 반기는 사람들이 더 많다”고 했다. 순찰 중에 만난 여러 시민들이 휴대전화를 꺼내 파랑이 사진을 찍거나 최씨에게 다가와 이런저런 것을 물었다.
파랑이와 같은 대형견만 순찰대원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난 16일 오후 7시 서울 광진구 중곡동에서 만난 신입 대원 ‘진주’는 몸길이 49㎝, 몸무게 4.8㎏ 수컷 몰티즈다.
견주 이등재(36)·한정아(32) 부부는 임시보호소를 전전하던 진주를 지난 2월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진주는 백내장을 앓고 있다는 이유로 입양 반나절 만에 다시 파양되는 아픔을 겪었다고 한다. 한씨는 “수술을 받은 덕에 다행히 왼쪽 눈 시력은 잃지 않았다”며 “사실상 한쪽 눈만 보이는 상황에서 열심히 순찰을 도는 진주가 대견하다”고 말했다.
진주의 주 활동무대는 어두운 골목길이나 주택 사이사이다. 이씨는 “진주가 냄새 맡는 것을 좋아해 주로 골목길로 산책을 다닌다”고 설명했다. 진주는 쌀쌀한 날씨 탓에 두툼한 옷 위에 순찰대 활동복을 껴입었지만 발걸음은 가벼워 보였다. 이 동네에서 40년가량 살았다는 한 여성이 진주에게 “조그마한 게 빨빨거리며 잘 돌아다니네”라며 응원의 말을 건넸다.
서울교통공사 지하철 보안관인 이씨는 ‘매의 눈’으로 CCTV 사각지대를 점검하거나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가로등을 찾는다. 그는 “어두우면 범죄 위험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날 순찰을 돌며 고장난 가로등 세 개를 찾아 메모했다. 이씨는 “진주 덕분에 퇴근 후에도 즐겁게 방범순찰 활동을 한다”며 웃었다. 한씨는 “산책하는 것을 좋아하는 진주에게 반려견 순찰대는 ‘선물’”이라며 “진주가 다른 유기견들에게 희망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반려견 순찰대는 출범 후 실종 신고가 접수된 발달장애인을 찾는가 하면 음주운전 차량을 적발하는 등 적지 않은 성과를 올리며 순항하고 있다.
서울시 자치경찰위에 따르면 지난해 5월부터 지난달 말까지 순찰대가 경찰에 접수한 방범 및 범죄 관련 신고는 서울 기준 499건에 이른다. 같은 기간 120다산콜센터에는 ‘생활위험 방지’ 신고 3477건이 접수됐다. 최근 연이어 발생하는 무차별 흉악범죄로 시민 불안감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반려견 순찰대에 거는 기대도 더욱 커지고 있다.
반려견 순찰대 참여를 희망하는 이들 역시 크게 늘어 지난달 9일 추가 모집을 실시해 292팀을 새로 뽑았다.
강민준 자치경찰위 경위는 24일 “반려견 산책이라는 일상적인 활동과 방범순찰을 연계하면서 적극적인 주민 참여를 유발한 것 같다”며 “기존 방범순찰 활동과 달리 부부 혹은 부모와 자녀가 함께 순찰을 할 수 있다는 점도 인기를 끄는 요인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반려견 순찰대는 특히 ‘MZ세대’로부터 주목을 받고 있다. 서울 지역 반려견 순찰대원 1011명 중 768명(76%)이 1980년 이후 태어난 것으로 파악됐다. 1980년대 376명(37%), 1990년대 365명(36%), 2000년대 27명(3%) 순이었다.
손재호 기자, 박종혁·방유경 인턴기자 sayh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