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내가 새치 수색꾼이 된 이유

입력 2023-11-22 04:05

내 소망은 할머니가 되어서도 나무를 깎는 것이다. 거기에 덧붙여 은빛 머리카락을 단정히 틀어 묶은 모습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지금처럼 무성하게 자라나는 새치를 보면 할머니가 되기도 전에 백발의 조각가라는 소망을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나는 낭만 가득한 바람과는 정반대로 거울 앞에 바짝 붙어 서서 군락을 이룬 새치를 공들여 뽑는다. 오늘은 5분 만에 흰 머리카락 열 가닥을 뽑았다. 마지막 한 가닥 때문에 진땀을 빼다 간신히 이룬 승리에 만족한 나는 족집게에 매달려 있는 새하얀 머리카락을 실눈으로 흘겨본 뒤 뻐근한 눈을 감는다.

어릴 적에는 한 손에 잡히지 않을 만큼 머리숱이 많았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감고 나면 부모님은 내 작은 등 뒤로 앉아 손수 머리를 말려주시고 윤이 나도록 곱게 빗질을 해주셨다. 아버지의 포근한 손길과 어머니의 다정한 눈빛을 등으로 흡수하며 그들이 행복하다는 걸 느꼈다. 그건 나의 행복이기도 했다. 별똥별처럼 찰나에 지나간 시절은 여전히 가슴속에서 영롱한 빛을 내는데 희끗희끗 보이는 흰 머리카락에 흐른 세월을 실감한다. 그러고 보니 내가 그 시절 부모님의 나이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흰 머리카락에 대한 글이 기록되어 있다. ‘아침에 흰 머리카락 여남은 오라기를 뽑았다. 머리카락이 흰들 무엇이 어떠랴마는 다만 위로 늙은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팔순의 노모가 자신의 흰 머리카락을 보면 마음이 상할까 봐 뽑을 따름이라는 이순신 장군의 마음을 이제야 알 것 같다. 순리를 거스르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건강한 삶의 명제라 생각해 왔기에 자연스러운 노화에 대해 긍정하지만, 부모님의 행복이었던 까맣고 윤이 나는 머리카락을 가진 딸로 조금 더 그들 곁에 있고 싶다. 백발의 조각가가 되겠다는 소망을 잠시 접어두고 새치 수색꾼이 되기로 한 이유다.

함혜주 이리히 스튜디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