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와 일상의 경계 바깥
생소하면서도 생명력 있는
‘올해의 일’은 무엇일까
생소하면서도 생명력 있는
‘올해의 일’은 무엇일까
각종 고지서와 명세서의 임시 거처인 우체통에 단정한 편지봉투가 들어 있다. 수신인란에 손글씨로 내 이름이 적힌 봉투를 뜯어보니 그 안에 탐스러운 꽃과 과일이 그려진 정물화 엽서 한 장이 들어 있다.
파리에 사는 친구가 몇 주 전 보낸 편지다. 엽서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래도 1년에 한 번은 엽서를 보내야지 하는 마음으로 쓴다.’ 그러고 보니 내게 축하하거나 기념할 일, 위로나 응원이 필요한 일도 없었다. 그저 ‘1년에 한 번은 엽서를 보내자’는 다짐으로 적어 내려간 글과 마음에 우표가 붙었다. 그 ‘그냥의 마음’이 마냥 싱거웠던 한 주에 양념이 되었다. 그 친구는 연말이 가까워오면 늘 이유도 없이 엽서를 보내는 사람이다. 하얀 종이에 낙엽 한 장을 붙여 날짜만 적어 엽서로 보내는 사람. 서툰 붓글씨로 내 이름을 쓴 걸 보내는 사람. 소소하고 별난 것들이 담긴 봉투가 종종 지구 반대편에서 건너왔다. 그 봉투를 열어보는 순간들이 매번 생생하게 기억나는 걸 보면 종이 한 장에 담긴 맛의 정수를 ‘양념’이라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엽서가 환기한 연말 분위기에 취해 1년에 한 번 하는 일이 무엇일까를 떠올렸다. 이왕이면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는 특별한 무언가가 떠오르길 바랐지만 야속히도 건강검진이나 연말정산 같은 체크 리스트들이 떠올랐다. 검진하고, 결산하고, 정산하며 살아가는 일련의 질서를 따르는 것이 현대인의 의무이니 어쩔 수 없다. 연말마다 개인과 조직이 재정과 건강을 점검하고 결산하느라 분주한 반면 요즘은 연례 행사처럼 기업과 기관에서 저마다의 ‘연말 결산 값’을 공개한다. 가장 많이 산 것과 간 곳을 데이터로 집계한 결괏값에는 자연스레 시대상이 녹아난다. 나에 대한 결산도 플랫폼이 대신해 준다. 나와 온라인으로 가장 교류를 많이 한 친구, 나의 SNS에서 가장 많은 ‘좋아요’를 받은 게시물을 알려주며 나의 소셜 윤곽을 확인한다. 전보다 더 많은 데이터를 쉽게 모으고 분석할 수 있으니 가능한 일이다. 최빈과 최다 값으로 산출한 최종 값은 모두 ‘업적’과 ‘의미’를 기린다. 그러나 남이 내린 결산에서 내가 찾고자 했던 ‘특별한 일’에 대한 힌트를 구할 수는 없었다. 올해가 가기 전 낙엽 한 장 들어 있었던 엽서를 열어봤던 순간처럼 생생한 인상을 남길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질문을 바꿔 1년에 한 번 꼭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그제야 가장 자주 한 일이 아니라 하지 못했으나 했어야 하는 일들이 떠오른다. 의무와 일상의 경계 밖에 있어 결산에 들지 못한 일의 목록에 결산과 정산에서 찾을 수 없었던 답이 있었다. 충분히 특별하진 않지만 충만하게 나의 하루를 빛내줄 것이 분명한 일들. 이유 없이 엽서 쓰기, 달빛 아래서 수영하기, 손수 케이크 만들어 선물하기 등 생소하지만 생명력 있는 일들은 아직 나의 올해의 장면에 끼어들지 못했다.
우선 친구가 보내온 엽서에 적힌 대로 나도 이유 없이 엽서를 보내는 일에 동참했다. 다음번엔 꼭 먼저 쓰는 마음의 주인이 돼야지. 텅 빈 엽서에 글을 적기 시작해 엽서 오른쪽 귀퉁이에 펜이 올 때쯤 마치 물을 준 듯 마음이 싱싱해졌다. 단 한 사람의 마음에만 쌓이는 사랑을 적는 일이 주는 충만함. 보낸 이와 받는 이가 각각 한 명인 역사가 오랜 행위를 통해 우리는 서로에게만 유효한 데이터를 만든다. 관계의 이력과 역사를 만드는 그야말로 슈퍼 데이터다. 다행히 12월이 있다. 아직 올해에 느끼지 못한 새로운 풍경을 만들 기회가 있다. 꼭 해야 할 리스트에 무엇을 올릴까? 손끝과 발끝에 파닥파닥 살아 있다는 기분 좋은 실감을 남기는 장면들을 더 많이 만들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AI 시대에는 즐거움을 경험해 본 사람만이 다른 걸 할 수 있기에 즐거움이라는 면역력을 키워야 한다는 예술가 백현진의 인터뷰가 마음에 오래 남았다. 이 글이 면역력을 틔우고 키우는 씨앗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누군가의 심심한 한 주에 이 글을 보낸다.
정유라 신한카드 빅데이터 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