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성지순례’란 말을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몇 년 된 것 같습니다. 나이 드신 교회 어른들이 이스라엘에 2주간 여행을 가려고 거의 1년 이상 ‘계’를 들었던 일이 있습니다. 거룩하고 큰 꿈을 안고 쌈짓돈 바리바리 모아가며 성지순례를 계획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목사인 저는 “교회 주보에도 넣어 광고해 달라”고 요청받을 때마다 ‘성지순례’라는 말 대신 ‘유적지 탐방’이란 용어를 써넣었습니다. 그땐 따로 묻는 사람이 없어서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1년이 다 지날 즈음 이스라엘 현지에서 큰 사고가 났다는 뉴스 때문에 계획 자체가 취소된 일이 있습니다. 계획이 무산된 다음 주일인가 봅니다. 관찰력 좋은 교인 한 분이 저를 찾아와 묻습니다. “그러고 보니 주보 광고도 그렇고 목사님 말씀에서도 성지순례라는 말을 한 번도 못 들어봤네요. 이유가 뭐죠.” 드디어 올 것이 온 것이지요. 그동안 어르신들 맘 상할 것 같아 대놓고 말을 못 했는데 이제서야 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성지순례’ 대신 ‘유적지 탐방’이라고 했던 이유는 종교개혁자가 깨달았던 기독교적 세계관 때문입니다. 교회는 언제나 ‘거룩과 속된 것은 구별돼 있다’며 성속(聖俗)의 구별을 강조합니다. 그 핵심은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인간은 인간이다’라는 성경의 가르침에 있습니다.
물론 중세 교회에도 성속의 구분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성속의 구별은 땅에 있는 물질까지 무차별적으로 확장됩니다. 이를 테면 사도들의 유물을 보거나 거룩한 땅을 순례하며 여행만 해도 죄가 줄거나 지워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나중에 면죄부 판매와 결합하면서 교회가 타락하게 됩니다. 구원을 바라는 사람은 돈을 손에 쥐고 있어야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 돼버린 것이지요. 그래야 죄는 작아지고 안전하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될 테니 말입니다. 그러려면 일단 돈을 많이 써야 합니다.
16세기 교회는 어디 가든 유물 천지였습니다. 어떤 곳엔 베드로의 손톱과 머리카락도 있고 어떤 곳엔 예수님을 십자가에 박았다던 못도 있습니다. 유물마다 등급이 있어서 어떤 것은 10년짜리 죄를 감해주기도 하고 어떤 것은 1년짜리 죄를 보속한다는 것이 당시 교회의 가르침이었죠. 아무나 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등급이 높은 유물일수록 인기가 높아서 큰돈을 내야 잠깐이라도 볼 수 있었습니다. 교회는 이를 통해 큰돈을 벌어들입니다.
성경을 공부하고 가르치던 독일의 마르틴 루터는 이런 상황이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거룩한 것이란 사도들의 유품이나 고대 유물이 아니다. 나에게 지금 주어진 소소한 것들이 거룩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기 때문이다. 거룩한 땅, 성지(聖地)란 저 멀리 예루살렘이 아니라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일상이다. 왜냐하면 내 삶의 자리는 하나님이 주신 소명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종교개혁자가 발견한 기독교 세계관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지금 이 순간, 이 자리’가 가장 소중한 시간이고 가장 거룩한 땅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하찮은 시간과 쓸모없는 장소는 없습니다. 돈도 없고 직장도 변변치 않고 병들었으니 이 순간 나는 쓸모없다고 비관하기도 합니다. 살다 보면 이해 못 할 아픔과 절망도 겪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이 하나님을 만날 가장 거룩한 시간, 거룩한 현장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저 하늘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땅, 매일 만나는 사람과의 관계, 그리고 일상이라는 작고 고요한 시간 한가운데서 우리를 만나십니다. 우리의 일상이 거룩한 성지입니다. 이제 저도 오늘의 성지순례를 위해 일어나야겠습니다.
최주훈 중앙루터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