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 육아라는 복잡계

입력 2023-11-21 04:08

아이가 어릴 때 박물관에 자주 갔다. 한동안은 업무에 필요해서, 그 뒤로는 밤샘이 잦은 부서에서 일하느라 그랬다. 야근 다음 날 졸지 않고 아이와 오후를 보내자면 어디라도 가야 했다. 박물관은 안전하고 쾌적하고 교육적인 공간이다. 무엇보다 게으른 엄마에게는 ‘아이 교육을 위해 뭔가 해냈다’는 안도감과 효능감을 줬다. 아이도 좋아했다. 그런 줄 알았다. 그때는 아이가 박물관의 청동검과 금관, 도자기를 재미있어한다고 믿었다. 착각이었다. 아이는 박물관 카페의 쿠키를 좋아했고, 버스에서 함께 들은 음악을 좋아했고, 집에서는 분주한 엄마를 독차지했던 둘만의 시간을 좋아했다. 전시는 지루한 대가였다. 그래도 교육적 효과가 있기는 했다. 취향 하나는 확실해졌으니까. 지금도 아이는 청자, 백자라면 지긋지긋해한다.

아이 키우며 겪은 실패가 이것뿐일까. 박물관 말고도 초보 엄마의 야심은 종종 웃기는 결말로 이어졌다. 이를테면 아기에게 별자리와 공룡, 곤충 이야기 같은 걸 읽어주면 이과형 인간이 되는 줄 알았다. 책을 읽어주면 책을 좋아하고, 그림과 음악에 많이 노출시키면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듯. 그게 과학 아닌가. 초등학생이던 아이가 우주과학책에 넌더리를 낸 걸 보면 사실이 아니다.

육아란 투입한 만큼 산출되는 산수가 아니고 아이는 부모가 빚는 대로 빚어지는 법이 없다는 자명한 사실은 매일의 실패를 통해 깨달았다. 의도는 과녁을 비껴갔고, 어디를 가리키든 아이는 항상 다른 곳을 봤다. 엇갈리는 사랑처럼, 불행한 연인처럼.

어쩌면 제대로 못해낸 게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틀림없이 그렇게 말할 거다. 부모가 역사와 과학을 더 많이 알았더라면, 그래서 과학책 읽기와 박물관 경험을 흥미진진한 이벤트로 만들었더라면, 도자기와 우주과학을 동시에 좋아하는 아이가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온라인에 떠도는 무수한 육아 조언이 전달하는 메시지가 정확히 이런 거다. 당신의 양육 전략이, 매일의 선택이, 충분하거나 충분하지 않은 부모 노력이 아이 인생을 바꾸고 미래의 성패를 결정한다고. 따라서 아이가 실패했다면 그건 부모의 실패라고.

이게 왜 틀린 말인지 증명할 능력은 없다. 하지만 평생에 걸친 1인분의 실험과 실패를 통해 개인적으로는 작은 위안에 도달했다. 세상에, 이 모든 게 부모 탓일 리는 없다. 유전이라는 변수를 빼고도 육아는 복잡계여서 부모의 어떤 인풋도 예상한 아웃풋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미국 심리학자 유코 무나카타의 말을 빌리자면 ‘부모는 오직 나비가 허리케인을 만들듯이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만’ 아이에게 영향을 끼칠 뿐이다.

다음 달이면 수능 성적표가 배달된다. 수험생에게는 대입 당락이, 부모에게는 20년 양육의 성패가 달린 평가서. 한국적 인식만도 아니어서 미국과 영국, 심지어 독일, 스웨덴 같은 유럽 국가에서도 지난 30년간 점점 더 많은 부모가 아이들의 학업 스케줄을 미세조종하는 ‘헬리콥터 맘’과 ‘타이거 맘’이 되고 있다(‘기울어진 교육’). 불평등이 심화되고 대학에 걸린 판돈이 커진 탓이다. 교육의 투자수익비를 올리려는 이웃 부모들의 ‘더 빨리, 더 세게, 더 길게’를 보며 누군들 조급해지지 않을까. 그럴 땐 무나카타의 이 말을 기억하면 좋겠다.

“부모는 아이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치지만 아마도 당신과 내가 추측하는 그런 방식으로는 아니다. 그러니 아이의 진로를 통제할 수 있다는 듯이 자책하는 걸 그만두라. 누구든 자식이었던 사람은 부모 탓을 그만하라. 다른 부모를 비난하는 것도 멈추라. 그리고 아이의 미래를 쳐다보는 걸 그만두고, 지금 오늘 이 자리에서 아이를 바라보고 사랑하라.” 육아에 대해 인류가 알아낸 거의 모든 것이다.

이영미 영상센터장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