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사법화… 헌재는 과부하

입력 2023-11-20 04:07

여야의 극한 대립에서 비롯된 정치적 성격의 소송이 몰려들면서 헌법재판소가 몸살을 앓고 있다. 헌재에 접수된 권한쟁의 심판 사건은 2017년 2건에서 올해 9건으로 급증했다. 법안 처리 과정에서 충돌한 여야가 대화와 타협으로 문제를 풀지 못하고 헌재로 넘기는 일이 잦아지며 발생한 현상이다.

법조계에서는 양당 간 정치적 분쟁을 사법기관에 떠넘기는 ‘정치의 사법화’가 ‘사법제도 오남용’ 수준으로 심화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헌재가 정치적 사건에 시간을 뺏기면서 핵심 업무인 국민 기본권 침해 사건 등의 처리가 지연된다는 우려도 크다.

19일 헌재에 따르면 권한쟁의 사건은 2017년 2건, 2018년 2건, 2019년 6건, 2020년 5건, 2021년 2건, 2022년 5건, 올해(11월 현재까지) 9건으로 증가 추세를 보였다. 2017~2018년엔 모두 정부 및 지방자치단체와 관련된 전통적 성격의 권한쟁의 사건이었지만 2019년부터 여야 대립으로 발생한 사건 비중이 높아지는 경향을 나타냈다. 헌정사상 총 5차례 접수된 탄핵소추 사건 역시 올해에만 벌써 2건(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안동완 검사)이다.

헌법재판관 사이에서도 정치적 사건이 헌재로 과도하게 넘어온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으로 전해졌다. 고위법관 출신 원로 법조인은 “정치는 옳고 틀린 게 없는데 사법은 옳고 틀린 것을 판단할 수밖에 없다”며 “사법부가 정치 사건의 판단을 내리면 패소한 쪽은 사법부를 비판하고, 국민 사이에 사법 불신이 초래되는 악순환이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일반적인 정치의 사법화를 넘어 사법제도의 오남용에 이른 상황”이라며 “‘사법적 결정을 따르겠다’는 수준이 아니라 정치적 결정 자체를 포기한 단계로 보인다”고 꼬집었다.

헌재 내부에서는 사건 접수가 연간 3000건에 달하는 상황에 여야 분쟁 사건까지 몰려 사건 처리 부담이 더 커졌다고 토로한다. 헌재 접수 사건은 재판관 9명과 연구관 70명이 배당을 받아 심리한다. 올해 8월 기준 전체 사건이 3471건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연구관 한 명당 수십 건의 사건을 쥐고 있는 셈이다.

헌재 연구관을 지낸 법조인은 “공장 기계가 아닌 사람이 하는 일이라 정치적 중요 사건을 맡다 보면 결국 다른 사건 처리에 쓰일 시간을 뺏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헌재는 사건 처리 인력이 부족하다는 판단에 따라 다음 해에 역대 최다 연구관 증원 방침을 세운 것으로 전해졌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