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 기각 알면서 남발”… 권한쟁의 올 9건으로 ‘껑충’

입력 2023-11-20 00:03
사진=권현구 기자

여야가 법안을 두고 극단 대치하면서 권한쟁의 사건도 증가하고 있지만 헌법재판소가 법안 가결 행위 자체를 무효로 판단한 사례는 역대 한 건도 없다. 2019년부터 현재까지 여야 간의 권한쟁의 사건 11건이 기각 또는 각하됐고, 2건은 심리 중이다. 정치 행위의 자율성은 최대한 인정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헌재 결정이 형성돼 온 것이다.

탄핵 사건 역시 인용된 건 박근혜 전 대통령의 경우가 유일하다. 법조계에서는 정치권이 기각이나 각하될 것을 예상하고도 ‘지지층을 향한 보여주기’ 목적으로 권한쟁의나 탄핵심판 청구를 남발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19일 헌재에 따르면 2020년부터 올해 11월까지 헌재에 접수된 권한쟁의 사건 21건 중 8건이 여야 대립에서 비롯됐다. 권한쟁의 심판은 국가기관 혹은 지방자치단체 사이 권한의 존재 여부나 범위에 대한 다툼이 벌어졌을 때 헌재가 유권해석을 통해 분쟁을 해결하는 절차다. 통상 중앙정부와 지자체 간 사건이 많다. 2017~2018년 권한쟁의 4건은 모두 지자체와 정부 혹은 지자체 간 발생했다.


2019년부터 극한 여야 대립에서 촉발된 권한쟁의 사건 비중이 커졌다. 2019년 권한쟁의 6건 중 4건은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원내 ‘4+1 협의체’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립 등 패스트트랙 법안을 밀어붙이다 발생한 ‘국회 패스트트랙 파동’에서 비롯됐다. 4+1 협의체는 그해 12월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골자로 하는 공직선거법 개정안도 통과시켰다. 이 과정에서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문희상 국회의장을 상대로 낸 2건의 권한쟁의 사건이 추가 접수됐다.

민주당과 위성 정당이 180석을 획득한 2020년 4월 총선 이후 대립은 더 극심해졌다. 지난해 5월 민주당의 ‘검수완박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추진 때는 국민의힘 의원과 국회의장 사이 권한쟁의 사건 등 총 3건이 헌재에 접수됐다.

올해도 3건의 권한쟁의가 접수됐다. 민주당이 주도한 ‘방송3법 개정안’과 ‘노란봉투법’의 국회 본회의 직회부 관련 사건이 2건이다. 이동관 방송통신위원장과 손준성·이정섭 검사 탄핵소추안 추진 관련 권한쟁의도 지난 13일 헌재에 추가로 들어왔다. 국민의힘 소속 의원 111명 전원이 청구인으로 이름을 올렸고, ‘야바위꾼’ 등 민주당을 겨냥한 거친 표현이 쏟아졌다.

권한쟁의 사건에 대한 헌재 결정은 절차상 하자나 위법성을 지적하면서도 정치 행위의 결과나 법안을 무효로 하지는 않는 방향으로 형성돼 왔다. 탄핵 사건도 공직자 파면을 정당화할 정도로 불법의 중대성이 크지 않는 이상 각하·기각해 왔다. 헌재는 정치적 책임을 묻는 곳이 아니라 사법기관으로서 규범적 시시비비를 가리는 곳이기 때문이다.

권한쟁의와 탄핵 사건 증가는 대화와 타협이 실종된 정치권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것이란 지적이다. 김상겸 동국대 법대 명예교수는 “의원 중 법조인 출신도 많다. 분명 기각될 것이라는 결과를 알면서도 시도해보는 것”이라며 “자기편 국민에게 어필하기 위한 정치적 제스처로 보이는 경우가 더러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 국회에선 이례적으로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지난달 헌재 국회 국정감사에서 김도읍 법제사법위원장은 “지적보다는 반성문을 쓰고자 한다”며 “국회가, 정치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사건을 헌재에 떠넘겨 재판이 지연되고 그 피해가 국가와 국민에게 돌아간다는 점을 반성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형민 박재현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