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조명환 (10) 넥솔바이오텍 설립… 글로벌 생명공학 회사 탄생

입력 2023-11-20 03:04
조명환(오른쪽) 회장이 2017년 서울 용산구 그랜드하얏트호텔에서 열린 셀트리온 창립 15주년 기념식에서 서정진 회장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조 회장 제공

1998년 스탠퍼드대학에서 돌아온 뒤 내 인생에는 또 다른 사람이 등장했다. 서정진 현 셀트리온 회장이다. 그는 나를 만나자 노랑 연필을 꺼내 하얀 종이에 생명공학 사업에 대한 구상을 설명했다. 나는 살면서 그렇게 간단명료하면서 머리에 쏙 들어오게 설명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는 대한민국에서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개척자의 마음으로 가고자 했다. 대한민국의 미래는 생명공학 산업에 달렸다며 나를 설득하는데, 생물학 교수인 내가 그에게서 생명공학 산업의 필요성을 배우는 것 같았다.

서 회장과 나는 오랜 논의 끝에 넥솔바이오텍을 설립하고 공동 대표로 생명공학 사업을 시작했다. 넥솔바이오텍은 미국 같은 선진국에서 개발된 신약을 한국에서 계약 생산하는 사업 모델에 관심을 가졌다. 일반적으로 제약회사들은 먼저 연구개발을 하고 개발한 의약품의 판매 허가를 받은 후 판매량을 늘려 가면서 생산 능력을 확대하는 과정으로 성장해 나간다. 하지만 우리는 반대로 했다.

나는 넥솔바이오텍이 생산할 수 있는 신약 후보 물질을 찾기 위해 서 회장과 함께 전 세계를 다녔다. 아마도 이때 가장 많이 비행기를 탔던 것 같다. 산업 스파이로 오해를 받아 미국 이민국의 조사를 받은 적까지 있었다.

우리는 에이즈 백신을 개발하고 있는 벡스젠에 관심을 갖게 됐다. 하지만 벡스젠은 넥솔바이오텍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바이오 사업 경험이 전무한 신생 회사였으니 당연했다. 그러던 중 벡스젠이 파트너로 낙점한 한국 대기업과의 협상이 결렬됐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때가 기회라 여기고 서 회장은 인천 송도에 공장 부지를 확보하고 3000억원을 유치하겠다고 약속하며 벡스젠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싱가포르 정부까지 유치에 뛰어들었으나 서 회장의 협상술로 벡스젠과 합의에 성공했다. 그러나 벡스젠은 마지막 임상실험에 실패해 사업을 접고 말았다. 이로 인해 넥솔바이오텍은 큰 어려움에 처했다.

그러나 서 회장은 굴하지 않고 블럼버그 박사, 메리건 교수와 지속적으로 만나더니 바이오시밀러에 눈을 떴다. 바이오시밀러는 고가의 바이오의약품을 복제한 약이다. 오리지널 의약품과 동등한 치료 효과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더 낮은 가격으로 더 많은 환자에게 치료 혜택을 제공할 수 있다.

이때부터 셀트리온이라는 거대한 스토리가 시작됐다. 그가 있었기에 한국에도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글로벌 생명공학 회사가 탄생했고 바이오를 전공하는 젊은이들을 위한 직업 창출이 가능해졌다. 나도 생명과학 교수로서 우리나라 글로벌 생명공학 산업의 탄생 과정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하나님은 생명과학 교수인 나의 인생에 서 회장을 등장시켜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귀하고 값진 것들을 가르쳐 주셨다. 나는 교수가 된 뒤 학교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일만 했는데 서 회장을 통해 시장경제와 기업 운영의 현장을 경험했다. 또한 과학자가 발견한 지식이 어떻게 상업화되어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고 더 나아가 국가 경제에 기여하는지도 체득하게 됐다.

정리=박용미 기자 m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