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을 마치고 돌아간 블럼버그 박사로부터 그해 10월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스탠퍼드대 초청으로 1년간 강의를 하게 됐는데 나에게 같이 갈 수 있겠냐고 묻는 편지였다. 나는 안식년을 활용해 스탠퍼드대로부터 체류비까지 받으며 생활할 수 있었다.
어느 날 블럼버그 박사와 식사를 했는데 그는 1년 중 7개월 정도는 메리건 박사와 에이즈 연구를 하고 나머지는 자기와 시간을 보내라고 했다. 메리건 박사는 세계적인 바이러스 석학이자 스탠퍼드대 에이즈연구소 소장이었다. 블럼버그 박사의 소개로 나는 메리건 교수가 이끄는 세계 최초의 ‘칵테일 에이즈 치료약’ 임상 실험에 참여할 수 있었다.
블럼버그 박사는 종종 나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점심 혹은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노벨상 수상자라 만나는 사람도 노벨상 수상자들이었다. DNA를 발견한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 박사 등 교과서에 나오는 노벨상 수상자는 거의 다 만난 것 같다. 어떤 때는 정치인도 만났다. 당시 상원의원이었던 조 바이든 대통령과 하원의장을 지낸 낸시 펠로시도 만났다. 특히 유전공학 기술을 탄생시키고 세계 최초의 생명공학회사 제넨텍을 창업한 허버트 보이어를 만났을 때의 감동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블럼버그 박사는 또 내게 캘리포니아 멘로파크와 팔로알토, 우드사이드를 지나는 샌드힐로드의 세상을 보여줬다. 실리콘밸리에서 성공한 기업들의 성공스토리는 샌드힐로드에 있는 벤처캐피털 회사들의 지원으로 탄생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 스카이프 같은 세계적인 기업들이 샌드힐로드에 있는 벤처캐피털의 자금으로 탄생했다.
블럼버그 박사는 나를 샌드힐로드에 데려가 실리콘밸리의 생태계를 구석구석 보여줬다. 과학자가 새로운 지식을 발견한 후 사업계획서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투자자들이 좋아하는 사업계획서는 어떤 것인지, 투자 결정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등 실리콘밸리에서 벌어지고 있는 벤처기업의 탄생과 성장을 알려줬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나는 블럼버그 박사의 의도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와 다니며 나의 사고력과 통찰력이 달라진 것이다. 나와 전혀 다른 분야의 사람들과 만나고 대화를 나누면서 같은 이슈를 보고도 과학자와 정치인, 기업인이 보는 시각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됐다. 이전까지 내 머릿속은 오직 생명과학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내 머릿속에는 사회과학과 인문학 등의 영역이 생겼다. 그리고 이들이 서로 융합되고 통섭하는 방법으로 사고하기 시작했다. 정말 놀라운 변화였다.
블럼버그 박사는 나에게 다른 과학자가 갖고 있지 않은 ‘끼’를 보았다고 했다. 세계를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과 일하는 삶을 살 수 있다고 본 것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전문 분야인 바이러스가 아닌 정치 경제 문화 등 다른 세계를 만나게 해 주는 것이 내게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스탠퍼드대와 실리콘밸리는 나를 교육하고 훈련한 가장 훌륭한 교과서이자 교육 현장이었다. 블럼버그 박사가 나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었으며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경험이었다.
정리=박용미 기자 m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