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13일 내놓은 근로시간 제도 개편 방향은 ‘일부 업종·직종의 연장근로 유연화’와 ‘장시간 근로·건강권 문제에 대한 안전장치 마련’으로 압축된다. 무엇보다 노사정이 참여하는 사회적 대화를 통해 제도를 개편하겠다는 것이 정부의 달라진 원칙이다. ‘주69시간’ 논란 등 여론 역풍을 맞으며 전문가 위원회를 중심으로 마련했던 정부 주도 개편안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다만 연장근로 관리 단위 확대를 두고 노사 간 입장 차가 극명한 만큼 실효성 있는 개편안을 도출하기까지 상당 시일이 걸릴 전망이다.
“제조업·생산직 등 유연화 필요성”
이성희 노동부 차관은 이날 정부세종청사 브리핑에서 “근로시간 제도 개편 관련 설문조사 결과 주52시간제가 상당 부분 정착되고 있는 반면 일부 업종·직종에서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모두가 공감하고 현장에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사정 대화를 통해 근로시간 개선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고용부가 공개한 대국민 설문조사는 지난 6~8월 근로자 3839명, 사업주 976명, 국민 1215명 등 6030명을 대상으로 실시됐다. 우선 현행 주52시간제(법정 근로 40시간+연장근로 12시간) 도입으로 장시간 근로가 감소했다는 의견에 동의한 비율은 근로자 48.5%, 사업주 44.8%, 국민 48.2%로 모두 높게 나타났다. 업무시간에 대한 예측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답변도 비슷한 비율을 보였다.
정부가 추진하는 ‘연장근로 관리 단위 확대’에 동의하는 응답은 근로자 41.4%, 사업주 38.2%, 국민 46.4%로 절반에 미치지 못했다. 일부 업종과 직종에만 단위 확대를 적용하는 안에 대해서는 근로자 43%, 사업자 47.5%, 국민 54.4%가 동의했다.
최근 6개월간 주52시간제로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다고 응답한 사업주는 14.5%에 그쳤다. 다만 업종과 규모에 따라 응답 차이가 컸다는 게 정부 설명이다.
이 차관은 “제조업이나 시설관리업이나 100~300인 이상 규모에서는 어려움을 겪었다는 비율이 30~40%로 올라간다”며 “심층 인터뷰에서도 일부 사업주는 주52시간제의 경직성 때문에 상당한 경영 위기를 겪은 것으로 나타났다. 꼭 필요한 업종·직종을 중심으로 제도개선 방안을 모색해 노사의 수용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연장근로 관리 단위 확대가 필요한 대표적인 업종은 제조업·건설업이, 직종은 설치·정비·생산직과 보건·의료직, 연구·공학 기술직 등이 꼽혔다. 제조업의 경우 근로자 55.4%, 사업주 56.4%가 관리 단위 확대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논의의 장 열렸지만… 시각차 여전
연장근로 관리 단위 확대를 주축으로 한 정부의 근로시간 개편안은 지난해 전문가위원회인 미래노동시장연구회 권고를 거쳐 올해 3월 입법예고됐다. 하지만 여론 반발이 일자 정부는 설문조사에 이어 뒤늦게 이날 사회적 대화까지 꺼내 들었다. 개편 논의가 사실상 원점으로 되돌아간 셈이다. 한국노총이 정부 제안을 즉각 수용해 논의의 장은 마련됐으나, 장시간 근로를 우려하는 노동계 시각은 여전하다.
이번 설문조사에서 근로자의 건강권을 보장하기 위한 방안으로 주로 꼽힌 것은 ‘주당 상한 근로시간 설정’(근로자 55.5%, 사업주 56.7%)과 ‘근로일 간 11시간 연속휴식’(근로자 42.2%, 사업주 33.6%)이다.
연장근로 관리 단위 확대 시 주 상한 근로시간 설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근로자의 48.7%, 사업주의 38.7%가 동의했다. 실제 관리 단위를 확대했을 때 주 근로시간 한도를 ‘60시간 이내’ ‘64시간 이내’ ‘64시간 초과’ ‘모르겠음’을 제시하고 선택하도록 한 문항에선 근로자 75.3%, 사업주 74.7%가 ‘60시간 이내’를 택했다.
이 차관은 “건강권 문제 등에 대한 현장의 우려를 근본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안전장치를 마련하겠다”며 “응답해주신 방안을 토대로 근로자의 건강권이 어떠한 경우에도 훼손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한국노총의 복귀로 일단 정부는 노동개혁 과제 추진에 필요한 사회적 대화의 틀을 갖추게 됐다. 정부는 노·사·정 대화를 지원하기 위해 업종·직종별 근로시간과 근로 형태에 대한 추가 실태조사를 진행할 방침이다. 실증 데이터를 바탕으로 최대한 빨리 구체적 대안을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 직속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서 노사정이 의제를 설정하고 본격적 논의를 개시하는 과정조차 순탄하지 않을 거라는 전망이 많다. 한국노총은 근로시간 개편 외에도 직무·성과급제 도입 등 정부가 추진하는 여러 노동현안에 반대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 지난 9일 야당 주도로 국회를 통과한 일명 ‘노란봉투법(노조법 2·3조 개정안)’에 대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경우 한국노총의 반발이 커질 수 있다는 점도 변수다.
이날 고용부는 올해 1∼8월 포괄임금 오남용 의심 사업장에 대해 실시한 기획 감독 결과도 발표했다. 감독 결과 포괄임금을 이유로 총 26억3000만원 상당의 수당을 지급하지 않은 사업장 64곳과 근로시간 연장 한도를 위반한 52곳이 적발됐다. 정부는 ‘공짜야근’의 주범으로 꼽히는 포괄임금제 문제를 근로감독 강화 등 행정조치를 통해 해결하겠다는 입장이다. 입법적 규제가 현장의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노동계는 정부가 포괄임금제의 문제를 알고도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세종=박상은 기자 pse0212@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