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플라스틱 빨대 금지’ 정책을 사실상 철회한 데 대해 종이 빨대 제조업체 누리다온 대표 한모씨는 13일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라면서 울분을 토했다. 그가 종이 빨대 사업에 뛰어든 것도 정부가 출연하는 기술보증기금에서 ‘권장 사업’으로 인정받아 투자금 유치에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정책 선회로 그는 처치곤란한 종이 빨대 3000만개와 15억원의 투자 손실만 껴안게 됐다. 일하던 직원 11명도 모두 떠나보내야만 했다.
정부의 ‘탈플라스틱’ 정책 후퇴의 유탄이 종이 빨대 시장을 뒤흔들고 있다. 앞서 환경부는 오는 23일 종료가 예고됐던 식품접객업 매장 내 플라스틱 빨대 금지 계도기간을 무기한 연장했다. 이 발표 직후 종이 빨대 수요는 급감했고 매출은 곤두박질쳤다. 영남지역 다른 제조업체 대표 A씨는 종이 빨대 400만개 발주가 취소되고 빗발치는 반품 요구를 감당해야만 했다. A씨 공장에 쌓인 종이 빨대 2000만개도 고스란히 재고로 남게 생겼다.
종이 빨대 업계는 정부가 정책에 대한 신뢰를 스스로 깨버렸다고 비판했다. A씨는 “플라스틱 빨대를 안 쓴다는 정부 정책 하나 믿고 여태까지 버텨왔다”며 “회사에도 법인 명의 부채 15억원이 남았다. 아무런 대책도 세울 수 없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한씨도 “지금까지 15억원을 투자했고, 그중 8억원 상당은 기계를 들여오는 데 썼지만 무용지물이 됐다”며 “수년간 연구해온 친환경 종이 빨대 기술도 마찬가지”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탈플라스틱 대책은 지난정부 때부터 이어져온 국정과제였다. 문재인정부는 2025년까지 플라스틱 폐기물을 20% 감축하는 것을 목표로 2020년 12월 ‘생활폐기물 탈플라스틱 대책’을 발표했다. 이듬해에는 식당 내에서 플라스틱 빨대 사용을 금지하는 ‘자원재활용법 시행규칙’도 공포했다. 현 정부 역시 ‘일회용품 사용 감량 지속 확대’를 국정과제에 포함시켰다.
종이 빨대 업계는 사전에 아무런 협의도 없이 정책 변경이 이뤄졌다며 배신감을 토로한다. 한씨를 비롯한 종이 빨대 제조사 4곳의 대표는 계도기간 종료를 약 두 달 앞두고 환경부 자원순환정책과를 찾았을 때도 ‘플라스틱 빨대 규제가 예정대로 시행된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하소연했다. 플라스틱 빨대 금지 계도기간 연장이 발표된 지난 7일 환경부 사무실을 방문했다는 A씨도 “환경부 공무원들이 미안하다면서 ‘종이 빨대 제조사들이 처한 상황을 전혀 몰랐다’고 했다”고 주장했다.
종이 빨대 업계는 ‘종이빨대생존대책협의회(가칭)’를 꾸리고 공동 대응에 나섰다. 이날 오후 정부세종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에 플라스틱 빨대 사용 금지 계도기간 연장 취소와 생존 대책을 요구했다. 또 환경부와도 면담했다. 협의회 관계자는 “간담회에서 지원 방안 등 확정된 대책 없이 입장 차이만 확인했다”며 “국내 종이 빨대 업체가 줄도산하고 산업이 무너지면 나중에 품질이 낮은 수입산 빨대에 의존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정헌 기자, 임소윤·이서현 인턴기자 hlee@kmib.co.kr